#1
날이 쌀쌀해지며 가을 작물들이 눈에 띄게 자란다 .
고구마를 캤다
.
호박도 땄다
.
이것저것 걷어와,
호박전도 부치고
고추찜과 K 가 처음에 아보카도인줄 알았다고 말한 호박요리 .
살짝 굽듯 익힌 호박에 양념간장 얹은 건데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음 .
호박거시기 ?
고구마를 캤으니 튀김과 깨보숭이 .
김치이긴 한데 , 재료가 좀 그렇다 .
시래기 만들려고 걷어온 무청과 웃자란 갓 두포기 , 쪽파 , 어린배추 한통과 늙은 호박을 넣은
정체불명의 잡 ? 김치쯤 되겠다 .
아무튼 고구마는 김치랑 먹어야 한다 .
#2
K 에게
10 월도 가고 있다 . 날짜만큼 추워지기도 하고 .
나는 감기가 오려나보다 . 이따금 기침도 나고 목도 아파오는 구나 . 가을볕과 달리 꿀꿀한 기분도 한 몫 하는 것 같고 . ‘ 멋보다 따뜻하게 입으라 ’ 는 아는 잔소리를 또 한다 . 항상 따뜻하게 다니렴 .
화가 났다가 답답했다가 허탈했다가 피로감까지 몰려오는 소식들이 넘치고 있다 .
언제가 “ 사람들은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견해를 보태는 게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한 것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 고 한 말 기억하니 ? 나는 요즘 이 말을 일부러 떠올린다 . ‘ 있는 그대로 보기 그리고 판단하기 ’ 가 필요한 때다 .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신념이든 뭐라 부르든 이해관계 없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기 . 사건에 욕망과 이해관계가 어설픈 신념과 결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린 많이 봐왔다 . 그래서 화가 나고 답답하고 어떤 이를 보면 ‘ 버럭 ’ 하고 어떤 이를 보면 헛웃음만 나와 , 그냥 외면하곤 한다 .
그래서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 내가 네 나이였을 때와 지금은 확연히 다른 공간과 시간이다 . 어젯밤은 잠자리에 들며 물었었다 . “ 시퍼런 분노와 독기로 삶의 한바닥을 헤매던 시절이 있었지만 우리는 충분히 근본적이었더냐 ?” “ ‘ 어쩔 수 없다 , 생활이다 ’ 라는 쉬운 핑계로 욕망을 좇지 않았던가 ?” 너희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문제들 . 너희들끼리의 갈등조차 이런 쉬운 선택의 결과중 하나라는 자괴감 같은 것이 들더라 . 지금 겪는 황당한 사건도 마찬가지고 .
그제부터 점심을 먹고 나면 20 여분쯤 걷고 있다 . 천천히 . 아주 천천히 .
뛰는 것만큼이나 일부러 느리게 걷는 것도 에너지와 집중을 요구한다 . 이 집중은 짧지만 답답함을 삭이는 데 도움이 된다 .
볕이 좋을 때다 .
K 야 , 네가 살면서 일희일노 ( 一喜一怒 )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구나 .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분노를 어떤 실행으로 바꿀 수 있을 거다 . 작은 성취와 기쁨이 있더라도 네 이익이 아닌 고요함과 기억함과 나눔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살면서 마주하는 개별의 소소한 일이든 정치적 이슈든 일희일노하지 말기 ,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기 그리고 판단하기 , 실천하기를 나도 다시 다짐해본단다 . 위로가 필요한 때이기에 .
사실 돌아보면 우린 참 많은 일을 겪었고 그런 세대들이 얽혀 산단다 . 식민지부터 , 전쟁 , 4.19, 유신 , 5.18, 87 년 , IMF, 수많은 남북문제와 사건들 , 소고기 파동 , 세월호 등을 경험했고 이에 따른 정권의 부침과 말로를 봐왔다 .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 고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 이렇게 약간의 통시적 시각을 보태면 조금 덜 답답해지고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
K 야 잊지 마렴 .
‘ 분노는 나아감의 동력으로 삼고 기쁨은 고요히 가라앉혀야 한다 .’
일희일노하지 말거라 .
오늘도 행복하렴 !! 고요히 .
<출처 : 강우근>
https://www.youtube.com/watch?v=rgo8NDSI-HQ&featur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