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아침 도시락을 쌌다.
두부 부치고 가래떡 굽고 산딸기와 블루베리 챙겨 K에게 다녀왔다.
녀석이 기숙사에서 내려오길 기다리는 동안 버찌를 땄다.
길을 점박이로 만들고 있는 벚나무 열매를 학교 경비아저씨 따고 계시기에 나도 용기를 내 한주먹 땄다.



K에게 “너네는 이거 안 따먹어? 열매가 멀쩡하게 다 있네.” 했더니
“먹는 거야? 아무도 모를걸.” 하며 “엄마, 아빠 채집 좀 하지 마.” 한다.
중학교 때, 학교에 감나무가 많았다.
가을이면 그 감 따 먹으려고 무던히도 애쓰던 생각이 난다.
감 따먹다 걸리면 ‘정학’이 교칙이던 학교였는데,
등굣길 머리 위로 어깨로 발밑으로 툭툭 떨어지던 홍시 앞에 교칙은 교칙일 뿐이었다.
모자로 떨어지는 감을 받아내다 모자 속에서 떠져버린 감 때문에 여러 명 울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 때 애들 같았으면 저 버찌 익기도 전에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
K에게
신문에서 보니 ‘리차드 기어’라는 배우가 불자인 모양이더라. 그런데 그 사람 인터뷰에
“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라며 보살의 원(願)을 세우고 수행한다.”라는 말이 있었어.
불자가 원을 세우고 수행하는 거야 당연한 걸 텐데.
그 원이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는 대답이 보기 좋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란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만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
나아가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바란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거야.
타자의 행복을 바란다는 건 그만큼의 실천을 한다는 거니까.
전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고통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연민이라면
친절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행동”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니?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고 친절하게 살피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오늘도 행복하려면 어떻게 너와 관계된 존재들을 바라봐야 할까?
행복은 내 안의 나만의 행복도 있지만 타자, 다른 존재와의 관계속의 행복도 있다.
마치 두 얼굴을 가진 것 같기도 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것이기도 해.
퀴즈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무언가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에 대한 답은 찾았어?
답은 ‘감사’야. 감사하는 마음, 무언가에 감사한다는 건,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것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라고 생각해.
연민과 친절이 너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바라보고 소통하는 그릇이라면 감사는 아마 내용물쯤 될 거야.
생명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공기를 하찮게 여긴다면, 인식조차 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숨 쉬기’를 통해 연결된 식물과 같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알 수 있으며
네 생명활동의 소중한 요소를 알 수 있겠니…….
그렇다고 공기와 같은 실제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것만을 감사대상으로 하라는 얘긴 아니야.
살면서 사소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을 잘 살피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고
소중하고 특별한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야.
누군가 너에게 베푼 작은 친절이나 도움을 너의 지위나 상황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의 실천이었던 친절’은 그냥 너의 잠시 편리함 정도로 끝나고 말 거야.
하지만 네가 그걸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면 차원이 다른 것으로 되돌려지지 않을까?
남들이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도 스스로에게 늘 물어보렴.
저게 과연 당연한 건가? 저것의 가치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늘 스스로에게 물어보렴.
‘감사’라는 말이 나오니까 ‘배 사’라는 말이 생각난다.
할머니가 잘 하시던 말인데. 지금 생각하면 할머닌 언어유희에 능하셨던 분 같아.
요즘 말로 하면 개그 감이 있으셨던 게지.
어릴 적 무슨 생각에서인지 뜬금없이 청소 같은, 할머니가 시키지 않을 일을 해 놓곤 했었는데.
그럴 때 마다 할머니에게 자랑 겸 공치사를 했었어.
“엄마! 어때? 잘 했지?” 하면 “그래, 잘했구나, 기특하네.”라고 할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꼭 “뭐 좀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라며 간식 같은 걸 바라는 뉘앙스를 풍기곤 했지.
그러면 할머닌 바로 “뭐 감사? 감은커녕 배도 안 산다. 니 콧구멍이다.
넌 내가 해준 밥 먹으며 매일 감 사냐? 배라도 사와 봐라.” 하셨지.
감사를 먹는 감을 사는 것으로 말을 바꾸거나 “엄마 심심해”하면 “간장 줄까?”로 대답하시던
할머니 개그가 그땐 썰렁하고 놀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재밌게 느껴진다.
그 땐 왜 할머니가 해주시던 밥을 당연히 여겼는지 안타깝기도 하고.
K야
우리 사소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고 그 가치를 높여보자.
현대 사회에서 ‘감사’라는 가치는 그냥 마음가짐이나 표현이 아니라
때론 소유와 연결되어 엉뚱하게 나타나기도 해. 물건 형태의 선물이 대표적일 텐데.
물건 값에 따라, 내 필요에 따라 감사의 마음과 표현이 달라지지.
이 경우 ‘소유’라는 형태가 발생하기 때문인데. ‘감사’의 가치조차 물신성에 빠진 경우일거야.
소유와 무관한 ‘감사의 마음가짐’ 늘 자신에게 묻고 살펴야 할 대목이야.
오늘도 모두 행복하기 위해 사회적 감수성을 활짝 열고 ‘감을 사’는 연습을 해보자.
비가 많이 온다. 작은 우산 쓰고 비 맞지 말고 좀 불편하더라도 큰 우산 쓰고 다녀.
그럼 오늘도 행복하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