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년 전, 제 곁을 영영 떠나버리신 울 아부지, 여름이면 메밀음식을 달고 사셨습니다.
모처럼 모시고 외식하러가면서 "뭘 드실래요?"하면,
그저, 냉면, 막국수, 메밀국수, 초계탕...이런걸 드시겠다고 했습니다.
특히 송추에 있는 평양면옥을 참 좋아하셔서, "우리 꿩냉면이나 먹자!" 하셨어요.
그 평양면옥의 냉면에 꿩고기가 좀 들어가지요.
폐암 투병하시면서, 마지막 외출이,
바로 이 평양면옥에서 냉면드시고, 근처 보광사를 다녀오신 것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몇발자국 걷는 것도 너무 힘들어하시니까, 지배인님이 쫓아나와서 친절하게 부축해주시고,
동치미를 너무 잘 드시니까 동치미를 따로 싸주시기 까지 하셨습니다.
그때 지배인 아저씨가 너무 고마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인사를 가야지 했지만,
한동안 평양면옥에 못갔더랬습니다. 아버지 생각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이지요.
몇달 후, 친정어머니와 간신히 평양면옥에 들어섰는데...음식을 주문하기 전부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우리가 가면 늘 반갑게 인사하고 주문을 받아가던 지배인 아저씨는 우리를 알아보고도, 먼 발치에서만 아는 척을 할뿐, 다가오시질 못하더라구요. 늘 같이 오던 체격 좋은 할아버지가 같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채신 것이죠.
이 집, 평양면옥은 냉면과 녹두지짐도 괜찮지만, 초계탕도 꽤 괜찮아요.
원래 초계탕을 먹으러 가던 곳은 법원리였는데,
솔직히 그 근처에 볼 일이 있으면 모를까, 초계탕만 먹자고 가기에는 거리도 너무 멀고, 음식맛도 뭐....
그러던차에 평양면옥에서 초계탕을 먹어보니, 법원리와는 또다른 맛인거에요.
법원리 초계탕은 국물을 닭육수로만 맛을 냈다면 평양면옥의 초계탕을 과일, 특히 파인애플을 충분히 갈아넣어,
더 상큼하다고 할까요?

요즘 제가, 군기가 좀 빠져가지고, 학업에 뜻이 없었습니다.
(아니, 뭐 별 일 없이도 너무 자주 지쳐서, 대충 대충 차려먹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메뉴로 초계탕을 생각하고는 닭 한마리를 푹푹 고았습니다.
푹 익은 닭은 살만 발라내어 냉장고 안에 넣어 식히고,
국물은 국물대로 식혔습니다. 그래야 기름기를 걷어낼 수 있잖아요.

법원리 초계탕 집 버전이 아니라,
평양면옥 버전으로 닭육수에 파인애플과 사과를 갈아넣고,
식초, 겨자,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양상추, 치커리, 적채, 오이 등등 집에 있는 채소를 넣어서 초계탕을 완성했는데요...
나름 시원하긴 했지만 평양면옥의 초계탕 만큼 상큼한 맛은 아니었습니다.
파인애플이 더 들어가야 하나봐요.
새롭게 음식을 시도하면서...제가 열등감에 많이 시달립니다.
요리선생님들은 물론이고, 내로라 하는 블로거들은 음식 만들때 실패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제 경우는 실패도 많이 하고, 실패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2% 내지는 20% 부족한 음식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똑 떨어지는 레시피를 써놓을 수가 없는 거에요.
오늘 초계탕도 맛있으면 자랑스럽게 레시피를 소개하려 했으나,
닭육수와 파인애플, 사과의 황금비율을 찾지 못해...재료의 분량은 생략합니다.
다만, 아 과일을 갈아넣는 초계탕도 맛이 괜찮구나...이렇게만 알아주세요.

초계탕을 하시거든, 메밀국수 삶아내는 것도 잊지마세요.
초계탕에 말아먹는 메밀국수도 꽤 괜찮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쫄깃쫄깃한 메밀국수를 넣어 드시는 것이 더 나아요.
툭툭 끊기는 메밀국수는 살짝 안 어울린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나저나,
이 삶아놓은 메밀국수가 남았는데, 그냥 먹을 수는 없고,
내일 전으로 부쳐볼까 하는데, 어떨까요? 이상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