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마와 무를 넣고 우려낸 국물로 끓였다.
‘아~ 시원하다’ 뜨거운 걸 먹으며 이렇게 말하는 게 모순일지 모르지만
‘시원하다’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맛이다.
다시마 우린 국물에 콩나물 넣고 한소끔 끓이다 불을 줄여 뜸들이듯 잠깐 두었다.
소금으로 간하고 마지막에 다진 마늘 좀 넣었다.
정말 오랜만에 맘에 드는 콩나물국, 어머니의 맛이 났다.

* 다시마 국물 내기
적당량의 물에 적당량의 다시마를 씻어 넣고 가스렌지 1단 정도로 뭉근하게 우린다.
보통 1시간 좀 지나면 다시마에서 젤 상태의 투명한 게 나온다.
취향에 따라 버섯이나 무를 함께 넣고 우려도 된다.
젤 같은 게 나오면 불을 끄는데 여름엔 센불에 확 끓여두는 게 좋다. 다시마 우린 물은 잘 상한다.

국물 우려내고 건진 무는 버리기 아까워 양념간장 넣고 무조림으로 변신.
표고버섯 하나 잘라 넣고 전날 깻잎 잴 때 쓰던 양념간장에 들어 있던 잣 때문에
재활용 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듯.

구운 파프리카와 생밤, 말린 대추를 올리브유와 허브(바질)에 소금 넣고 버무려서…….
샐러드라면 샐러드고 뭐라 부를지 모를 반찬 또 하나.

구운 고구마에 치즈크림 발라 또 하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으슬으슬 춥고 바람 부는 아침,
‘시원한’ 이라 말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콩나물국을 떠올리는 오전.
H씨에게 문자가 왔다.
웅~~~ (울리면 문자와쑝이라 듣는다.)
“심심하네 뭐해요”
나 : “추위에 떨고 있음”
웅~~
“많이 추워요? 햇빛 찾아가요”
나 : “햇빛도 추워요”
웅~~
“불쌍한 내 남편이네 ㅜ_ㅡ”
나 : “불쌍하긴 당신이 있어 괜찮아”
웅~~
“그건 그래 후웃 ㅋㅋ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야”
나 : “내가 전생에 우주를 구했지 ㅋㅋ”
웅~~
“이제 일해 연락 못함. 우주를 구한 사람한테”
-------------------------------------------------------------------------
졸지에 ‘우주를 구했던 사람’이 된 문자놀이로 비록 콩나물국은 아니 먹었어도 따뜻해졌었다.
그러다 점심 먹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덜컥 당혹, 열불, 쯧쯧 혀를 찰 기사를 보고 말았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310001008
“日은 자살 택했고 韓은 멱살 잡았다”는 제목의 서울신문 기사인데 도쿄특파원 이00이 썼다.
기사는 2004년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자살 사건을 새삼 전한다.
일본 외교관이 노래주점의 중국여종업원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이를 빌미로 정보 제공을 요구하는
중국 당국에 “나라를 팔 수 없다”며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추문을 일으킨 상하이 한국영사들과 비교
“한국은 강제소환이나 이들에게 사표를 받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일본 외교관은 죽음으로써 명예를 지켰다.” 며 “일본혼의 발로”라는 인용으로 끝맺는다.
처음엔 이게 뭐 뮝!
그러다 화가 올라왔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쯧쯧 혀를 차줄 정도로 화가 올라왔다.
뭐 생명 존중이니 하는 얘기하기 전에,
당시 일본 언론이 평했다는 ‘일본혼의 발로’의 일본혼이 뭔지 따질 필요도 없이.
사건은 일본 외교관이 주점의 종업원과 성매매를 했다는 거고 이를 빌미로 협박이 있었다는 거다.
물론 협박의 내용은 외교관 신분의 보장과 기밀 정보의 교환이었다.
그 일본 외교관의 유서에 쓴 나라를 파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건이다.
엄밀히 말해 그 일본 외교관이 죽음으로 회피하고 싶었던 건
외교관이라는 신분의 박탈 내지는 하락과 참을 수 없는 망신이었던 거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극단적 무책임에 지나지 않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가치 있는 죽음’이란 게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왕 죽는 것 (스스로)가치 있는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인간의 심리를 뭐라 할 것까진 없지만
‘가치 있는 죽음’의 ‘가치’는 고민이 필요하다.
전쟁터에서 맞는 죽음은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든 상관없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고 가치 있는 것일까?
바람피다, 성매매하다 꼬투리가 잡혀 선택한 죽음도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치 있는 죽음일까?
그냥 안타깝고 애처로운 죽음일까?
살아 있는 것에, 살아 있다는 것 말고 가치가 있긴 있는 걸까?
생명의 가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가치 있는 죽음’은 애초에 모순 아닌가?
아니면 비싼 목숨 싸구려 목숨이 따로 있기라도 하다는 말인가? 이런 물음들이 꼬리를 무는 날이다.
서울신문이, 도쿄특파원이 왜 저런 기사를 썼는지 모르지만 참 나쁜 기사다.
죽음으로 모든 추문을 덮으라는 저주일리도 없고
설마 한국 영사들의 행위를 애국과 매국의 잣대로 대체하겠다는 의도도 아니겠고 참 나쁘다.
다시 따뜻한 콩나물국과 물컹 달착지근 짭쪼롬한 무조림이 당기는 오후다.
저 두툼한 빈대떡 사진이라도 기자에게 보낼까? 아까우려나…


아~ 그런데 인당수에 몸을 던질때 심청이는 가치있는 죽음을 택한걸까? 그냥 안타까운 죽음이었을까?
참 거시기 한 오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