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오르셨나봅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가세요.”
“예. 고맙습니다.”
산을 오르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인사를 한다.
좁은 길에선 서로 먼저가라며 흔쾌히 양보한다. 뒤따라오는 이가 빠른 것 같으면 비켜서주기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이 느릿느릿 가도 여유 있게 기다려주기도 잘한다.
지리산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산행 길,
함께 간 L이 뜬금없이 한마디 한다.
“산에 오면 사람들이 어찌나 너그럽고 친절해지는지…….”
“그러게 공기 좋은데 오면 저절로 착해지나…….”라며 추임새를 넣자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뺏어먹을게 없어서겠지.”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산에서 먹는 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
“나 좀 사네하고 드러낼 게 별로 없잖아. 기껏해야 장비 차인데” 라며
“고~래 텍스(Gore-tex)냐? 아니냐? 정도” 농을 한다.
푸하하!!! 순간 뿜고 말았다. 자신의 자켓을 가리키며
“이 고~래, 좀 있으면 동네 강아지도 입고 다닐 걸 아마!” 라고 너스레 떠는 그의 말에 한참을 웃었다.
“악의 없음을 표현하는 건지도 몰라. 왜 외딴 곳에서 사람 마주치는 게 젤 무섭데잖아.”
“ ‘나 나쁜 사람 아닙니다.’ 하는 인사 같은 거…….”
“어쨌든 사람이 친절하고 너그러운 건 좋은 거잖아. 도시서 못하는 거, 산에서라도 하면 다행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산행은 느릿느릿 쉬엄쉬엄 이어졌다.
산 밑부터 중턱까진 단풍이 한창이더니 오를수록 앙상한 가지와 낙엽만 수북이 보인다.
마치 가을에 떠났는데 도착하니 겨울이더라고 지리산 장터목이 그랬다.



장터목 산장, 데크에 앉아 황태와 치즈를 놓고 소주 한 잔.
먹다 남은 황태와 콩나물, 김치를 넣고 끓인 찌개에 저녁 겸 또 소주 한 잔.
이곳에선 젤 귀한 게 술이다. 아끼고 아껴 먹어야 긴긴 산속의 밤을 보낼 수 있다.


장터목서 바라본 해넘이.

천왕봉으로 출발하기 전, 새벽 5시 속을 채우기 위해 끓여 먹은 누룽지

장터목서 천왕봉으로 오르기 전 제석봉을 오르는데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아직 몸에서 열이 나기 전이라 한기도 든다.
꽁꽁 옷깃을 여미고 렌턴 불빛 따라 한발 한발 계단을 오르니 제석봉이다.
후~ 길게 숨 한 번 들이 쉬고 하늘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새벽녘 별이 예술이다.
뒤따라 올라온 사람들도 하늘을 보며 한마디씩 한다.
“지금 날씨면 오늘 해 보겠다.”
“글쎄, 바람이 센데 언제 구름이 몰려올지…….”
“이 많은 사람 중에 복 지은 사람 없겠나. 한 사람만 있으면 볼 수 있다 카드라.”
“맨 날 뜨는 해 보면 어떠코 안 보면 어떤노. 난 저 별 봤으니 되따.
해는 니 집 아파트 안방서 봐라. 저 별은 집에서 못 본다 아이가! 저기나 실컷 담아가라!”
쏟아질듯 펼쳐진 별 잔치에 한껏 들뜬 산행은 천왕봉 밑 통천문을 지날 때쯤 걱정으로 바뀌었다.
별은 간데없고 허옇게 안개 내려앉듯 회오리인 듯 바람따라 몰려 올라오는 구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구름을 밟고 있음을 알면서도 천왕봉에 모인 사람들은 추위에 잔뜩 웅크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해돋이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해뜨는 걸 잠깐이라도 볼 수 없었다.
하산길, 천왕봉 밑 샘터에 앉아 물 한 모금 먹고 있는데 아줌마들 몇이 뒤따라오더니
“방금 올라간 아저씨 세 분은 요~ 밑에 앉아서 해 봤데요.”라며 일출의 아쉬움을 얘기한다.
“저 많은 사람 중에 복 지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이~.”
별 악의 없는 말이지만 좀 불편하다.
복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살짝 불편하다.
L에게 “참 그 놈의 복!” 라니
“그러게 좀 착하게 살아. 난 착하게 사는데 왜 못 봤을까.” 껄껄거리며 대답한다.
“수고하십니다.”
“일찍 갔다 오시네요.”
“장터목서 1박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한 참 가셔야겠네요.”
내려가는 만큼 올라오는 낯선 이들과 기분 좋고 친절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터덜터덜 내려와 식당에 앉아 점심 겸 막걸리 한 잔했다.

식당서 점심 먹고 오르려는 사람들과도 오지랖 넓게 “위에 날씨 어떠냐?”
“이제 출발하면 부지런히 가야겠다.” “며칠이나 있기에 짐이 저리 많냐?”
“그리 오래 있을 수 있고 좋겠다.” “살펴가라” 따위의 인사를 나누며 상냥함이 온 세상을 덮었으나.
중산리서 진주로 나와 터미널서 마주치는 등산복에 배낭 맨 사람들과는
데면데면 바라만 볼뿐 말 한마디 안 섞게 되더라. 일상으로 복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