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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가을에 떠났는데 겨울도 보고 별도 담고

| 조회수 : 6,771 | 추천수 : 99
작성일 : 2010-11-09 14:56:30
“수고하십니다.”
“일찍 오르셨나봅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가세요.”
“예. 고맙습니다.”

산을 오르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 인사를 한다.
좁은 길에선 서로 먼저가라며 흔쾌히 양보한다.  뒤따라오는 이가 빠른 것 같으면 비켜서주기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이 느릿느릿 가도 여유 있게 기다려주기도 잘한다.

지리산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산행 길,

함께 간 L이 뜬금없이 한마디 한다.
“산에 오면 사람들이 어찌나 너그럽고 친절해지는지…….”

“그러게 공기 좋은데 오면 저절로 착해지나…….”라며 추임새를 넣자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뺏어먹을게 없어서겠지.”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산에서 먹는 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
“나 좀 사네하고 드러낼 게 별로 없잖아. 기껏해야 장비 차인데” 라며
“고~래 텍스(Gore-tex)냐? 아니냐? 정도” 농을 한다.

푸하하!!! 순간 뿜고 말았다. 자신의 자켓을 가리키며
“이 고~래, 좀 있으면 동네 강아지도 입고 다닐 걸 아마!” 라고 너스레 떠는 그의 말에 한참을 웃었다.

“악의 없음을 표현하는 건지도 몰라. 왜 외딴 곳에서 사람 마주치는 게 젤 무섭데잖아.”
“ ‘나 나쁜 사람 아닙니다.’ 하는 인사 같은 거…….”
“어쨌든 사람이 친절하고 너그러운 건 좋은 거잖아. 도시서 못하는 거, 산에서라도 하면 다행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산행은 느릿느릿 쉬엄쉬엄 이어졌다.

산 밑부터 중턱까진 단풍이 한창이더니 오를수록 앙상한 가지와 낙엽만 수북이 보인다.
마치 가을에 떠났는데 도착하니 겨울이더라고 지리산 장터목이 그랬다.






장터목 산장, 데크에 앉아 황태와 치즈를 놓고 소주 한 잔.
먹다 남은 황태와 콩나물, 김치를 넣고 끓인 찌개에 저녁 겸 또 소주 한 잔.
이곳에선 젤 귀한 게 술이다. 아끼고 아껴 먹어야 긴긴 산속의 밤을 보낼 수 있다.





장터목서 바라본 해넘이.




천왕봉으로 출발하기 전, 새벽 5시 속을 채우기 위해 끓여 먹은 누룽지




장터목서 천왕봉으로 오르기 전 제석봉을 오르는데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아직 몸에서 열이 나기 전이라 한기도 든다.
꽁꽁 옷깃을 여미고 렌턴 불빛 따라 한발 한발 계단을 오르니 제석봉이다.
후~ 길게 숨 한 번 들이 쉬고 하늘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새벽녘 별이 예술이다.

뒤따라 올라온 사람들도 하늘을 보며 한마디씩 한다.
“지금 날씨면 오늘 해 보겠다.”
“글쎄, 바람이 센데 언제 구름이 몰려올지…….”
“이 많은 사람 중에 복 지은 사람 없겠나. 한 사람만 있으면 볼 수 있다 카드라.”
“맨 날 뜨는 해 보면 어떠코 안 보면 어떤노. 난 저 별 봤으니 되따.
해는 니 집 아파트 안방서 봐라. 저 별은 집에서 못 본다 아이가! 저기나 실컷 담아가라!”

쏟아질듯 펼쳐진 별 잔치에 한껏 들뜬 산행은 천왕봉 밑 통천문을 지날 때쯤 걱정으로 바뀌었다.
별은 간데없고 허옇게 안개 내려앉듯 회오리인 듯 바람따라 몰려 올라오는 구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구름을 밟고 있음을 알면서도 천왕봉에 모인 사람들은 추위에 잔뜩 웅크리고 발을 동동 구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해돋이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해뜨는 걸 잠깐이라도 볼 수 없었다.

하산길, 천왕봉 밑 샘터에 앉아 물 한 모금 먹고 있는데 아줌마들 몇이 뒤따라오더니
“방금 올라간 아저씨 세 분은 요~ 밑에 앉아서 해 봤데요.”라며 일출의 아쉬움을 얘기한다.
“저 많은 사람 중에 복 지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이~.”

별 악의 없는 말이지만 좀 불편하다.
복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 살짝 불편하다.  
L에게 “참 그 놈의 복!” 라니
“그러게 좀 착하게 살아. 난 착하게 사는데 왜 못 봤을까.” 껄껄거리며 대답한다.

“수고하십니다.”
“일찍 갔다 오시네요.”
“장터목서 1박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한 참 가셔야겠네요.”

내려가는 만큼 올라오는 낯선 이들과 기분 좋고 친절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터덜터덜 내려와 식당에 앉아 점심 겸 막걸리 한 잔했다.




식당서 점심 먹고 오르려는 사람들과도 오지랖 넓게 “위에 날씨 어떠냐?”
“이제 출발하면 부지런히 가야겠다.” “며칠이나 있기에 짐이 저리  많냐?”
“그리 오래 있을 수 있고 좋겠다.” “살펴가라” 따위의 인사를 나누며 상냥함이 온 세상을 덮었으나.

중산리서 진주로 나와 터미널서 마주치는 등산복에 배낭 맨 사람들과는
데면데면 바라만 볼뿐 말 한마디 안 섞게 되더라. 일상으로 복귀다.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mulan
    '10.11.9 3:02 PM

    지리산 장터목에 갔던것이 93년도였던것 같은데... 그때가 그립고 기억나네요. ^^ 사진 감사해요.

  • 2. 훈연진헌욱
    '10.11.9 3:50 PM

    와............눈이 호강하고 갑니다.

    가을의 색이란 이렇게 여러느낌을 줍니다. 해마다 같지만 해마다 다르고요..
    오늘..아이를 기다리는 중에 연세 지긋하신 아주머니 한분께서 자줏빛으로 불타오르는 단풍을 핸드폰 사진기로 찍고 계시더라구요..서울 한복판 아파트단지 안에서도 타오르는 단풍일진대..

    자기들 마음껏 숨쉬고, 겨울되기전 마지막 자태를 뽐내는 산에서의 단풍이야 말할것도 없겠습니다.

  • 3. 오후에
    '10.11.9 3:55 PM

    뮬란님//정말 오래되셨네요. 93년이면... 사진으로라도 즐기셨다니 다행입니다.
    훈연진헌욱님//저도 휴대폰으로 찍은겁니다. 혼자보기 아까워 올렸습니다.

  • 4. 딴길
    '10.11.9 4:19 PM

    아름다운 생활수필 한 편과 사진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들이 마치 눈 앞에서인냥 생생하게 살아있네요.
    기복(祈福),을 불편해하는 마음을 들여다보니 '오후에' 님의 단정함이 느껴집니다.
    지리산, 섬진강이 명품 한셋트로 느껴지는 사람으로서
    지리산행기는 참 보기가 좋네요, 더군다나 가을이니까요. ^^

  • 5. 단추
    '10.11.9 6:22 PM

    와...
    장터목...
    대학교때 7박 8일로 지리산 종주를 한 적 있었는데 지금도 삼봉산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모습이 잊혀지질 않아요.
    그게 20년 전이군요.
    아... 20년이나 되었네....

  • 6. 옥수수콩
    '10.11.9 7:05 PM

    저도 15년전에 지리산 다녀왔었는데....(반야봉까지만...--;)
    지리산 너무 멋집니다.
    그리고 그 산을 오르신 님도 멋지십니다...!
    덕분에 눈이 호강하네요^^

  • 7. 초록
    '10.11.9 10:49 PM

    멋진 분이세요.
    사진 잘보고 갑니다.

  • 8. 순덕이엄마
    '10.11.10 3:03 AM

    한국산이 최고에요. 흑흑..ㅠㅠ

  • 9. 첵첵이
    '10.11.10 11:38 AM

    만삭이라 가만히만 있어도 숨이 차는데 덕분에 지리산 구경까지 하네요.
    정말 호강에 겨웠습니다.
    멋지세요~~

  • 10. 플러스
    '10.11.10 12:34 PM

    장터목산장.. 그립네요.
    대학3학년때 3박4일 장터목을 거쳐서 천왕봉에 올랐던기역.
    천왕봉에 산듯 죽은듯한 나무들은 지금도 있나요?
    여름에 올랐었는데...
    가을 산행도 아름답습니다.
    근 25년이 더 된듯한데요.
    추억속으로 데려가줘서 감사합니다

  • 11. vayava
    '10.11.10 3:47 PM

    지난주에 다녀왔던 곳이라 아주 공감합니다^^
    내려오는길에 돌탑하나 짓고 오는데
    언제 또 여기 올라올 수 있으려나 생각했네요.

  • 12. 오후에
    '10.11.10 5:53 PM

    딴길님//지리산과 섬진강 명품세트란 말에 공감합니다.
    단추님//지리산 종주를 7박8일이나 하셨으면 완전 산사람되어 내려오셨겠어요
    옥수수콩님//ㅎㅎ 제가 호강시켜드린건가요?
    초록님//잘 보아주시니 감사
    순덕엄마님//산은 어디든 다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움이겠지요. ㅠㅠ
    책책이님//만삭이시라니 순산하시길...
    플러스님//ㅎㅎ 20년, 15년, 25년 전에들 오르셨네요... 산듯 죽은 듯한 나무들 아직 있습니다. 고사목인데 죽어서 천년을 간다하니 앞으로 쭉~ 있을겁니다. 사람손만 안탄다면요..
    vayaya님//반갑네요 저도 지난 일요일 올라간건데...

  • 13. 열무김치
    '10.11.10 9:29 PM

    김치 콩나물 황태국 !!!!!!!!!!!!!!!!! 정말 맛있어 보여요 !

    소주랑 치즈 조합이 참 궁금한데요 ?

  • 14. 오후에
    '10.11.11 3:52 PM

    열무김치님//소주랑 치즈... 괜찮은데요. 전 즐기는 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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