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일찍 퇴근해 텃밭에 갔다.
1주일 사이 더운 날씨만큼 시금치와 상추가 훌쩍 자랐다.
시금치와 상추 솎고 물주고 났는데도 아직 훤할 정도로 해가 길어졌다.
시금치를 솎으며 H는 “김밥 먹고 싶다.”를 노래한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잔뜩 움츠려 있던 4월을 보상이라도 하듯 농작물들이 급하게 자란다.
성질 급한 시금치 몇 녀석은 벌써 꽃대를 올렸다.
앞집에 상추와 시금치 좀 나눠주고 시금치는 다듬어 살짝 데쳐 놓았다.
‘내일 아침은 김밥이다.’ 냉장고 뒤지니, 계란 있고 당근도 있다. 시금치야 솎아 온 것 있고 깻잎도 있다. ‘굳이 더 필요 하다면 어묵이겠다.’ 저녁 먹고 산책길, 만 원짜리 한 장 챙겨나갔다. 돌아오는 길 어묵과 유부하나 샀다.
우리 집은 마눌 H와 고2 딸 K, 나 이렇게 세 식구다. 그런데 셋의 식성이 다 다르다. 한마디로 3인 3색이다. 마눌 H씨는 육 고기뿐 아니라 조류, 어류, 패류 일체를 안 먹는다. 굳이 먹는다면 유제품과 달걀, 어묵정도다. 나는 ‘발 달린 짐승’은 삼간다. 딸내미는 기분 내키고 맛있으면 뭐든 다 먹는다. 이런 셋이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메뉴정하는 게 제일 큰일이다. 요즘 애들 말로 ‘장난 아니게 완전 힘들다.’
이런 우리 집 김밥엔 당연히 고기나 햄이 없다. 딸내미 때문에 넣는다면 콩 햄을 넣거나 따로 쌀 수밖에 없다.
토요일 한 시간 먼저 일어났다. 전날 어묵 볶고 시금치 삶아 놓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김밥인데 손이 많이 간다. 우선 좀 되직하게 밥부터 앉혔다. 계란지단 부치고 식는 동안 당근 볶고 시금치 무치면 될 것 같다. 순서대로 달걀 두 개 풀어 소금 간하고, 지단 부쳐 도마 위에 올려 식혔다. 동글동글하니 잘 부쳐졌다. 지단이 잘 부쳐지면 괜히 기분이 좋다.
당근은 작은 채칼로 썰어 볶았다. 당근 꺼내며 눈에 띈 느타리버섯도 잘게 찢어 살짝 익혔다, 너무 익히면 물이 나올 것 같아. 내친김에 깻잎 몇 장도 씻어 김밥 재료들과 함께 커다란 접시에 올렸다. 야채김밥 재료 준비 완료다. 마지막으로 고슬고슬한 밥을 양푼에 퍼 소금과 참기름 넣어 살살 섞었다.
김밥말기와 썰기는 H씨가 했다. 나는 그 옆에서 우아 떨며 신문 보았다. 그런데 젓가락 놔두고 자꾸 손이 간다. 그것도 김밥꽁지만 나오면 낼름 손이 가진다. ‘모양 빠지게…… 쩝~’
봄․가을 소풍, 초등학교 땐 운동회 이렇게 3번쯤 어머닌 김밥을 싸셨던 것 같다. 아니 3남매니 횟수는 좀 더 되겠다. 지금처럼 입식부엌도 아니고 불을 여러 개 쓸 수 있는 가스레인지나 전기렌지도 없던 시절, 연탄아궁이와 석유곤로로 거들어 주는 이 아무도 없이 다섯 식구 김밥을 싸야하는 아침, 어머니가 얼마나 동동거려야 했는지 마흔 넘은 이제야 짐작이 간다. 어머니 옆에 달라붙어 김밥 꽁지 집어먹던 기억은 있는데 동동거리며 싸셨을 그 김밥으로 어머니께서 아침드신 기억은 없다. 참 무심하고 어린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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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아침에 김밥이야기
오후에 |
조회수 : 12,259 |
추천수 : 210
작성일 : 2010-05-17 11: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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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페스토
'10.5.17 11:37 AM요즘들어 키톡에 자주 올라오는 김밥님들.
나들이의 계절이 돌아왔음을 여실히 알려주는 것 같아요.
엄마가 싸준 김밥 한손으로 통째로 들고 먹었었는데
그립네요. 저도 어묵은 꼭 김밥에 넣어 먹는 일인이랍니다.2. 푸른두이파리
'10.5.17 1:09 PM저 어제 저녁 김밥 말아 먹으려다 게으름신에게...
오늘 재료준비 해야겠어요^^3. 맑은샘
'10.5.17 1:19 PM저두 얇다리한 어묵 간간 달달하게 조려서 넣습니다. 그래야 맛있는거 같아요. 아이들 다 컸어도 한 번씩 집에서 싸먹어요.
4. 상큼마미
'10.5.17 5:30 PM어제 저도 김밥 만들었어요^^
남편이 애들처럼 김밥타령 하길래 10줄정도 했더니,
자르지도 않고 통째로 먹네요~~~
막내딸은 친구랑 배드민턴 치면서 먹는다고 하길래 호일에 싸서 주었지요
다녀와서 하는말 "세상에서 엄마표 김밥이 제일 맛있다"
힘은 들었지만,온가족이 맛있다 하니 자주싸야 할까봐요~~~~~~~5. 네오
'10.5.20 12:24 AM가족식성이 다 다르시니 외식은 뷔페로 가셔야겠네요..ㅎㅎ
음식준비를 사이좋게 함께하시나봐요...완전 부럽습니다..6. marina
'10.5.20 1:12 AM저도 텃밭을 한답니다..^^
한동안 추워서 느리게 자라더니 요 며칠 자라는게 보이네요.
참 따님이 부럽습니다.
아빠...좋은 아빠신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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