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생명 있는 것 없는 것 아픔과 노고와 인연을 알아 소중히 합니다.
이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해지고 꾸려지는 모든 것이 소중합니다.”
텃밭의 방울토마토다.
한 알의 방울토마토가 땅에 떨어져 적당한 때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다시 열매를 맺지만
열매는 앞의 열매와 다르다. 앞의 열매와 싹 트인 땅이 다르고 햇볕이 달랐고 물이 달랐고 꽃피고
수분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들은 누대에 걸쳐 같지만 다른 생을 잇는다.
그 중 상당 부분은 내 생으로 이어지는 희생이 된다.
십 수 년 텃밭을 했지만 이제야 이런 방울토마토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어디 방울토마토뿐이랴 만!
이들의 노고에 비해, 겨우 거름 넣어준 땅에 모종해주고 이따금 물 준 내 수고는 참 보잘 것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과실은 내가 챙긴다. 세상 참!
땅과 햇볕과 물을 먹고 자라는 작물들을 보면 사람도 ‘이러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이 씨앗엔 보이지 않지만 씨앗에서 본성대로 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를 맺은 것처럼
‘사람도 본성대로 사는 것이겠지’ 하는.
다만, 적절한 시기에 파종하고 물주는 것처럼
‘사람에겐 좀 더 평화롭고 긍정적인 모습들을 가르치고 스스로 경계하는 노력이 더 해지는 것이겠지’ 하는.
가만 보면 내 안에는 많은 내가 있다.
아침이면 아버지와 형과 마당 우물가에 앉아 이를 닦던 대여섯 꼬마도 있고
일하러 사우디 가신다는 아버지 따라 처음가본 공항 에스컬레이터만 신기해하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소리 없이 눈물 흘리던 열 살 무렵의 소년도 있다.
괜한 심통과 세상 모든 시름 짊어진 듯 행동하던 질풍노도의 알 수 없는 녀석도 있고
서슬 퍼런 독기와 분노로 삶의 한바닥을 헤매던 놈도 있다.
그 밖에도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를 숨기기만 급급한 나, 비교하고 험담하며 문득 거짓을 자연스럽게 행하는 나,
버럭 하는 나, 알면서도 두 번째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본다. 찌질 한 내가 내안엔 참 많다.
내 안의 긍정과 부정의 모습들은 어디서 왔을까?
물려받은 것도 있고 내가 선택한 것도 있으리라. 일조량처럼 방울토마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건도 있으리라.
하지만 긍정의 모습을 키울지 부정의 모습을 키울지 또 그것을 드러낼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
마치 방울토마토에 물을 주는 것처럼.
삶의 여러 상황에서 아직 철이 덜 들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는 녀석이 드러나지 않도록 잘 타이르는 것,
분노로 헤매는 놈을 진정시키는 것,
마냥 돌봐주어야 할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도움만을 바라고 투정부리지 않도록 하는 것,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상황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
이 모두 텃밭을 가꾸듯 그렇게 내 안의 ‘나’들을 키우면 되지 않을까?
정성스럽게 애틋함과 너그러움과 부드럽게 ‘나’들을 돌본다면
덜 화내고 덜 비교하고 욕심은 조금 더 비우고 어리석음도 조금 더 덜며 그렇게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이것이 K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오늘만이라도 내 안의 ‘나’들에게 일일이 부드럽게 말 걸어보고 정성스럽게 들어주고
애틋한 마음으로 물을 주고 너그럽게 안아주어야겠다.
그렇게 어쩔 수 없었던 부모님을 이해하고 나 살기 바빠 K에게 전해진 부분 있거들랑 K가 잘 돌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K야 미안하구나. 오늘도 행복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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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서 구한 가지와 풋고추, 꽈리고추, 감자, 근대, 부추, 돌나물, 깻잎으로 차린 밥상
근대 들어간 감자찌개와 버섯볶음, 돌나물 부추 샐러드?는 내가 한 것 같고
가지 무침과 꽈리고추와 멸치조림은 H씨가 한 것 같다. 양파와 고추 장아찌는 H씨가 담가 뒀던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