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내 선생님이기도 했던 연구와 강의를 업으로 삼는 선배가 있다.
나이 들며 악기와 목공 등을 배우시는데 언젠가 “직업병인지 뭘 배우면 배우고 말면 되는데 이걸 꼭 어떻게 누구한테 가르칠까 이런 걸 고민하게 된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데 꼭 설명하고 있고 나이 먹은 선생질인지 꼰대질인지…….”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실제 선생도 아니고 강의를 업으로 삼아 본적도 없는 내가 요즘 그런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동석한 후배에게 “요즘 뭘 자꾸 설명하려고 해. 말도 많아지는 것 같고 괜한 꼰대질 하는 것 같아 걱정이야”라는 말을 한 적 있다. 그 때 거나하게 취했던 후배 “형 그러는 지 꽤 됐어. 이제 안거야? 늙었다는 거지! ㅋㅋ” 거리기에. “내가? 전에는 안 그랬다. 요즘 들어 그러는 것 같은데.”라고 반문하자. “이젠 우기기까지. 버럭질, 참견하고 설명하는 꼰대질, 우김질. 딱 3종 세트 완성이네.ㅋㅋ”라는 놀림을 들었다. 그런데 진짜 걱정이다. 버럭질, 우김질, 꼰대질이 느는 것 같아. 입은 닫고 손발이 부지런해져야 한다는데 왜 입으로 짓는 일들이 느는 걸까?
김치와 동치미 무, 고추 장아찌 양념으로 비빈 냉면
숟가락으로 떼어낸 수박도 두어 쪽 올린 역시 한여름 저녁이다.
고구마 순을 꺾어다가 껍질을 벗겼다.
탁자에 놓고 선풍기 바람 쏘여가며 천천히 쉬엄쉬엄.
밥을 지었다. 완두콩과 단호박을 넣고.
고구마 순은 고추장 풀어 지지고 가지는 굽고 호박잎도 데치고
복숭아와 사과도 썰어 내고 풋고추도 내어 저녁을 차렸다.
느릿느릿 준비한 그러나 그릇을 깨끗이 비운 한여름 저녁이다.
고춧잎을 무쳤다. 된장과 고추장으로, 다진 마늘과 참기름을 넣고.
고춧잎 무친 양푼에 묻은 양념이 아까워 밥을 비볐다. 묵은 갓김치 쫑쫑 썰어 넣고.
더위 탓하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맥주를 반주 삼은 역시 한여름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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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흔히들 ‘더 나은 삶’을 얘기한다.
물론 더 나은 삶의 척도는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마음의 평안을 바라지만 대개는 물질의 풍요를 바란다. 물론 마음의 평안과 물질의 풍요 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는 이들도 있다. 드물게는 ‘나’아닌 타자의 평화와 안녕만을 바라는 이도 있다. 때론 더 나은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견디기도 하며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배우기도 한다.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의 자세가 그래서 더 강조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더 나은 삶’이 과연 있을까? 대체 무엇보다 더 나은 삶이라는 건지? 오늘 보다 나은 삶이라면, 오늘의 고통, 위험,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면 더 나은 삶이 되는 걸까?
사람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생명 있는 것 뿐 아니라 생명 없는 것들도 변한다. 이걸 우리는 시간이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K야, 더 나은 삶이란 이런 변화에 얼마나 조응하느냐는 문제 아닐까? 나도 남도 세상도 모두 시시각각 변한다. 따라서 삶도 변한다. 이런 변화에 고정불변의 ‘나’를 구하지 말거라. 고정불변의 ‘나’를 생각하는 순간 비교하게 되고 내 것을 움켜쥐게 된단다. ‘나는 있긴 하되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성찰을 놓쳐선 안 된다. 그래야 내 삶의 지향을 바로 세울 수 있다. 지향이란 내 삶의 목적을 확실히 하는 거다. 움켜쥐며 살지, 나누며 놓아버리고 살지, 둘 사이의 균형을 좇을지 네 삶의 지향을 선택하렴. 그 지향점을 따라 변화하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덕목이다.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공부는 하기 싫은데 할 줄 아는 것도 할 것도 없고…….’ 하는 너의 고민은 삶의 지향을 정하는 데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여행에서 네가 어떤 해답을 구했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설사 답을 구하지 못했어도 괜찮아. 답을 구했다 해도 그 답에 매일 필요도 없다. 삶이란 본래 불확실하고 늘 변하는 거니까.
삶은 항상 현재라는 걸 잊지 마렴. 미래에 대한 계획과 대비가 소용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너무 방점을 둬 현재라는 삶을 방기하지 말라는 거야. 오지 않은 미래는 현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으니까.
날이 덥구나.
시원한 팥빙수가 생각나는 날이다.
K야, 오늘도 행복하렴
* K에게 하는 이 것도 괜한 이야기 무한 반복하는 꼰대질이겠죠?
아~~ 어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