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가운데 서 있으니 나이탓인가...
늘 해뜨고 지는 일상생활이 요즘은 무척 시큰둥해지고
티비 보다가도 눈물이 금방 맺히고 까닭없이 허전하고 그렇더라구요.
여기 오시는 많은 언니들이 들으시면 콧방귀감이지만
요즘 제가 그랬어요.
그러다 오늘 문득 어린시절 흑백사진처럼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구요.
어릴적 이즈음 집에서 잔치를 한번 했나, 아님 늘 하던건데 기억이 딱 그거 하나인가...
암튼 그 시골 잔치가 생각이 났어요.
(묵은 콩이 제법 있어서 미숫가루를 했었어요.
추석즈음에 이리저리 퍼주고 나니 요만큼 남네요.
미숫가루도 맛있는 비율이 있다고 방앗간 사장님이 그래요.
통보리를 70%, 찹쌀 20%, 콩10%래요.
집에서 찹쌀을 불려 고두밥을 찌고 다시 말려서 가져갔어요.
그나마 콩도 검은콩이 아니고 메주콩이라 좀 섭섭하지만
올해 넘기면 안될것 같아서 그냥 했어요. 애들이 맛있게 잘 먹었어요.)
지금보다 약간 더 깊은 가을일거예요.
마을옆을 빠져나가 만나는 "듬배미" 논옆에 여름내내 가지며 오이며 열심히 따먹던 밭은
어느덧 배추, 무로 주인이 바뀌고 훌쩍 자란 무잎이 바람소리따라 서걱거리는 그런 스산한 계절이었어요.
엄마가 농사일 틈틈이 자고 갈 손님들이 베고 덮을 베겟잇과 이불보를 빨아 널고
쌀을 불리고 메밀을 씻어 담그고
팥이며 나물거리들을 그득그득 물에 담가 갈무리하기 시작하면
어라? 며칠새에 우리집에서 맛있는걸 많이 먹겠구나... 어린 맘에도 설렘이 시작되었어요.
지금같으면 전화로 쇼핑으로 간단히 해결될 일도
그 시절엔 모든게 할머니, 엄마, 아버지의 손끝을 거쳐야 했지만
그것이 그다지 이상하거나 번거롭다 생각되지 않았던
별로 오래지 않은 얘기예요.
(시골에서 고구마순 얻어다가 실컷 먹었네요.
살짝 데쳐서 김치도 담가먹고 생선밑에 깔아 지져먹기도 하고
들깨가루 넣고 나물도 볶아먹고요.
이 사진은 새콤달콤 초무침이네요. 남편이 잘 먹는 반찬이에요.)
그렇게 음식재료를 챙기면서도 설겆이하는 틈틈이 엄마는 놋그릇을 닦아냈어요.
전 '유기'란 말을 책에서 처음 보았네요.
할머니 엄마는 '놋그릇 놋그릇' 하셨어요.
듣기론 기왓장을 곱게 갈아 짚으로 닦았다던데
엄마는 그냥 씩씩하게 마당에 늘 있는 고운 흙을 짚에 뭍혀
할아버지 재떨이까지 닦아내면 완벽히 끝나는...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는데
엄마 저도 닦아보게 하나만 줘보세요... 소리를 한번도 하지 않은 나쁜 딸내미네요.
그 많던 놋그릇, 아니 유기는 다 어디로 흩어지고
마지막 남았던, 제가 눈도장 찍으며 내꺼라고 챙기던 재떨이까지도 없어지고 말았어요.ㅎㅎ
하나도 닦아드리지 못한 벌인듯하니 섭섭함도 아직 말하지 못했어요^^;;
(고들빼기 김치도 한번 담가먹고요. 어릴땐 씁쓸한 반찬을 왜 먹나 했는데
이젠 저도 머위며 고들빼기며 씁쓸한 맛이 참 좋아요. 밥맛도 막 좋아지고...^^;;)
어른들 상차림에 올라갈 놋그릇이 챙겨졌어도
엄마의 수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지요.
온동네 사람들이 다 와서 먹어야하는데 그시절 살림이란게 솥이며 상이며 그릇이며 숫가락 젓가락이
한집에 다 챙겨져 있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양은대야 이고서 집집이 다니며 빌려다 놓아야 했어요.
이집 저집 물건들이 다 섞이면 나중엔 어떻게 돌려주나... 걱정되세요?
걱정없어요. 접시나 대접을 뒤집어보면 집집마다 큰아이 이름을 써놓던지 날카로운 물건으로 세모 동그라미등등
나름의 표식을 해놓았거든요. 수저 젓가락은 손잡이 맨끝에, 상은 뒷면 바닥에...
신통하게도 어느 한집 모양이 겹치지않고 다 틀려요.
그도 그럴것이 오늘은 우리집 다음달엔 너희집 늘 돌아가며 같은 과정을 겪는지라
어떤 표식이 뉘집것인지 다 아는거지요.
(우리 할머니의 딱하나 남은 그릇이에요.
옛날엔 이런 대접이나 하얀 주발, 또는 옥색에 파란색 테두리가 쳐진 접시등등이 대부분이었나봐요.
홈셋트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엄마가 큰맘 먹고 '한세트' 들이기 전까진
울집에도 저런 사기그릇 아니면 스텐그릇을 썼어요.
시절이 좋아서 이 하나 남은 녀석이 울집 장식장에 자리잡고 있는거지요.^^
아직 골동품상 같은 곳엔 안가봤지만 옛날 대접이며 접시며 무척 그리워요.
물심양면으로 여유가 생기면 하나씩 데려다가 대접옆에 같이 놓아두고 싶은 소망이....
어쩜 이게 딱하나 남고 말았을까요... 엄만 아직 젊은게 왜 이런걸 좋아하냐고 타박주세요.^^;;)
그렇게 사전준비를 해놓고도 엄마의 일은 아직 시작한 것도 아니예요.
냉장고도 없던 그때 장날마다 한번씩 나가서 마른것, 과일등등을 미리 사다 놓았어도
고기나 생선은 목전에 닥쳐서 구입해야 상하지 않고 잘 쓸수 있으니
장에 나가 홍어같은 생선을 들이고
돼지를 잡거나 혹은 필요한만큼 사거나 해야 했고
잔치 전날엔 어김없이 아버지가 닭 몇마리를 잡으시고 가마솥에 쪄낸 고두밥으로 인절미를 쳐내셨어요
지금은 그런 인절미를 찾아볼수가 없네요. 직접 해먹지 않는한은...
쫀득한 떡 사이에서 아직도 탱탱하니 살아, 한알씩 씹히는 고두밥이 드문드문 있던... 인절미요.
콩가루도 그땐 훨씬 더 고소하고 맛있었는지
떡 써는 할머니옆에서 연신 콩가루 고물을 찍어 먹었는데요.
아침드시고 얼른 다녀온 방앗간에서 빻아준 멥쌀가루로는
늙은호박을 썰어넣은 물호박떡, 다디단 무를 채썰어넣은 무시떡(..ㅋㅋ ... 무떡)이
김을 폭폭 내면서 커다란 질시루에서 익어갔어요.
그렇게 야채의 물기를 품은 떡은 식으면 촉촉하고 더 맛있어서
인절미와는 또 다르게 맛있게 먹었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선 한번도 못먹었어요. ㅠㅠ
(명절을 한번 지내니 구운김 선물이 참 많이 보여요.
울집에도 하나 생겨서 여태 먹던 구운김을 자잘하게 잘라 참기름, 물엿, 통깨좀 더해서 무쳐먹었어요.
오래두면 기름도 생기고 덜 맛있더라구요)
잔칫날 아침이 되면 아버지는 다른 아저씨들과 함께 동네에 하나뿐인 하얀 차일을 마당에 치시고
이집 저집에서 걷어온 멍석을 온 마당에 깔아 두십니다.
뽐뿌샘 옆에 있는 바깥 아궁이에 솥을 걸어주시고
칼도 다시 갈아주시고
마지막엔 자전거로 두어번 왕복하여 막걸리를 받아 오십니다.
(가끔 마트에 가면 꼭 쳐다보는곳이 있어요. 버섯코너인데요.
이렇게 자잘한 느타리가 두팩에 300원, 또는 500원정도에 너댓개씩 떨이상품으로 올라와있으면
무조건 다 집어와요.
이 버섯도 볶아먹고, 데쳐내어 갖은양념에 무쳐도 먹고, 계란오믈렛도 해먹고 실컷 먹다가
그래도 남으면 냉동실에 얼려놓아요.
된장찌게나 불고기 또는 잡채등에 조금씩 들어갈때 꺼내써요.
고기없이 표고우린 국물에 계란만 조린건데요.
물엿을 살짝 넣어주니 계란이 탄력이 생겨서 부서지지 않고 쫄깃거려서 좋았어요.)
일찌감치 새벽밥을 얻어먹은 그날은
저 또한 긴요한 일손이 됩니다.
이리 저리 엄마 할머니 심부름을 하고
중간중간 나온 자잘한 설겆이를 수도 없이 하고
엄마가 다른 일 하는 사이 아궁이 불도 보고
틈틈이 젖먹이 동생도 업어주고 말이죠.
(먹다먹다 남은 아삭이고추를 카레에 넣었더니 맵지 않고 향긋한것이 별미였어요.
애들은 여기까지 고추를 넣느냐고 불만...카레는 좋으나 야채는 노땡큐래요.
이녀석들 얘기는 별도로 한 꼭지를 할애해야해요.
요즘 제가 아이들때문에 할 말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바쁜 잔칫날은 동네아짐들도 엄마에 의해 호불호가 철저히 갈립니다.
나름 큰 살림이었던 우리집엔 그만큼 큰일도 많아서 아짐들 도움이 무척 아쉽고 고맙고 그랬어요.
그렇지만 사람사는게 늘 그렇더군요.
한집에 동서들도 아롱이 다롱이 다 다른데
하물며 일가친척이 많은 동네라지만 일찍 와서 내 일처럼 도와주고 애써주는이가 있는가하면
점심때 저녁때같은 식사때만 슬쩍 와서 몇가지 도와주고 밥먹고 음식 싸가는게 끝인 이도 있었어요. 어린 제 눈에도...
그래도 엄마 할머니는 아무말 않으시고 반겨주시고 밥먹고가라 잡고 애들 멕여라 싸주더라구요.
어린맘에도 이해가 안되서 그 다음날 그 얘기를 하면 꼭 그러세요.
이런다고 내치고 저런다고 내치면 내곁엔 사람이 없다...............
옛날엔 그렇게 다들 보살이었는데요 .ㅋㅋㅋ
(추석에 울엄니가 다 싸주신 육전...
생선,고기,나물,식혜,떡,부침개.... 차례지내고 남은걸 모두 절 주셨어요.
외아들이라 나눠갈 동서들도 없고 시누이들도 당신들꺼 처리하기 바쁠테고...
조금만 준비하시면 좋을텐데 늘 많아서 명절때마다 냉장고가 몸살이 나요^^;;
이래저래 열심히 먹고 남은 마지막 육전을 심심한 불고기 양념해서 뚝배기에 살짝 볶아봤어요.
달큰해서인지 아이들이 잘 먹었네요.)
가마솥에서 엄청나게 많은 밥이 고소한 향을 풍기며 뜸이 들어가고
돼지고기가 익어가고 추어탕이나 아니면 청둥호박과 돼지고기를 썰어넣은 빨간 고기국물이 설설 끓어가고
뒤집은 솥뚜껑에선 별것없는 솔(부추)전이며 깻잎전이 수더분하게 지져지고
만만한 생선 넣고 오랫동안 조려지는 나박나박한 무조림이 익어가고
홍어가 무쳐지는동안
이쪽으로 가서 돼지갈비 한대 얻어먹고
저쪽으로 가서 부침개 하나 얻어먹고
그날만은 친구들한테 으시대며 인심쓰며 먹을것 챙겨주고 그랬어요.
(남편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그러니까 맛있게 먹고 이왕이면 돈도 많~~이 벌어와앙!.............
이렇게 말하고 싶을때 하는 짓거리^^;; 내 의도를 들켜버렸는지 한번 픽 웃어주고는 잘도 집어드시는 내남자...^^;;
하얀 동부묵가루에 비트 서너조각 던져넣고 묵을 쑤어서 쟁반에 얇게 펴서 굳혔어요.
상추 깔고 매화모양틀로 하나씩 찍어내어 얹어놓고 양념장 뿌리고...
비트 하나 사서 나박지 모양으로 썰어 냉동해두고 서너조각씩 꺼내쓰니 좋네요.
또한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인 중국식 야채볶음...
요 꽃빵에 싸먹는 재미를 무척 좋아한답니다.
어째 꽃빵이 튼실하지 않슴? 집에서 만들어보았어요.
이제 꽃빵 사먹는것도 졸업이요~~~)
그땐 온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일시에 밥을 먹어도
그날만은 밥이며 국이며 고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또 그렇게 준비해야만 했어요.
며칠날 누구네집 잔치가 있으니 그땐 맛있는거 많이 먹겠구나 기대하면서
그날만 기다리니까요.
마을 남정네들도 나이 지긋한 여인네들도 이날만은 눈치보지 않고 막걸리를 맛나게 마실수 있구요.
그렇게 먹고 마시고 장구 두들기며 박수치고 놀다보면
어김없이 어둠이 내리고 날씨도 추워지지만
아버지는 다시 두꺼운 장작들을 높이 쌓고 모닥불을 피워 어둠도 밝히고 추위도 잊게 하십니다.
이런날 애들도 꼭 늦게 자요.
밤이 늦도록 불주위를 돌며 놀거나 어두운김에 집안 곳곳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해서
시끄럽기가 자갈치시장이지만 어른들 누구도 집에가라 쫓지도 않았고 혼내지도 않았어요.
(출근하는 남편 간식주머니에 아무말 안하고 이렇게 담아서 보냈어요.
간식 나눠먹으려 꺼내다가 헉! 했다네요.
'울 마눌'이 돈을 두 봉지나 준 알고....^^;;;
나도 마음은 이렇게 봉투 가득 돈을 담아주고 싶다만...
속엔 요런 물건이 들어 있다는...
배배 꼬인 내 마음일까요?ㅋㅋ
근데 식어도 부드러운 찹쌀꽈배기 레시피 있으세요?
좀 알려주시길...)
괜히 부모님 생각이 나서 시골집에 전화를 드렸어요.
가을겆이가 바쁠때라 늦게까지 일하셨는지 식사가 늦으셨네요.
하루 날잡아 도우러 가겠다는 말을 얼른 뱉어내지 못했어요.
이번주말엔, 아니 다음주말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시골집에 가야겠어요.
(어느날은 호떡을 열심히 지졌군요. 아침준비할때...
이것도 시간이 지나도 쫄깃한 레시피좀... 굽신굽신...^^;;
코코넛 마카롱이에요. 쫄깃하니 맛있어요.
짝퉁 초코파이... 초코렛넣어 케잌을 잘 굽고
마쉬멜로를 얹어 살짝 구워 말랑해지면 다시 케잌 한장을 덮어 지그시 눌러줘요.
하다하다 이젠 초코파이까지 만들어 온다고 놀렸다네요. 동료들이...
제 입엔 덜 달아서 초코파이보다 훨씬 맛있어요.
엊그제 어느분이 환상적인 고구마요리 접수하시기에 알려드린
고구마 핫케잌!
하나만 먹어도 든든하고 좋드만
작은넘은 고구마대장이라 세개먹고 더 찾아요.
잘먹을때 제일 이뻐요. ㅋㅋ)
그렇게.... 마치 영화처럼 어릴적 우리집 잔칫날이 떠올랐네요.
젊은 나날 그렇게 많은 일에 치인 엄마 생각에 잠깐 울컥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추억을 잔뜩 먹어서 맘이 무척 행복해졌어요.
이젠 얼른 정신차리고 커튼도 달고 계절옷도 정리해야겠어요.
오늘밤엔 꿈속에서 다시 즐거운 잔치가 펼쳐질지도 모르겠네요.
(막걸리 한병 사다가 술빵을 쪄서 하루 간식으로 잘 먹었습니다.
저도 한잔 맛있게 따라 마시고도 막걸리가 남아서 처음으로 증편을 해보았어요.
키톡에도 레시피가 많이 있어서 어렵지는 않았어요.
더구나 지난번에 떡만들때 고생시킨 쌀가루가
보드라운 증편으로 이쁘게 탄생한터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여 한조각씩들 드세요.
님들 드리려고 대추를 많이 얹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