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된 일인지 녀석의 잠자리 뒤끝이 길다.
잠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못 일어나고 끙끙거린다.
“K야 일어나라”를 외치던 H씨 나보고 깨워보란다.
8시가 넘었다며 “일어날 수 있지?”하고 물으니 절래절래 고개를 흔든다.
“그럼 더 잘래?” 물으니 또 고개를 절래절래.
“그럼 일어나”하며 이불 밖으로 나온 녀석의 발을 주물러 주었다.
일어나긴 해야겠는데 잠은 안 깨고 맘과 달리 몸은 무거운가보다.
발이 거칠거칠하다. 뒤꿈치엔 각질도 제법이고.
용천혈이란 곳을 힘껏 눌러주자 아픈지 움찔움찔하면서도 다른 발을 내민다.
이렇게 발 주물러주는 것도 어릴 땐 한없이 사랑스럽더니 이젠 좀 징그럽다.
더 이상 조막만한 발도 아니고 발가락은 또 어찌나 긴지.
“일어날 수 있지?”라며 H씨 아침 준비 거들러 나오니 벌써 끝나있다.
요즘 H씨가 아침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손이 빠르다.
K가 좋아하는 양념간장 뿌린 생 깻잎과 말린고구마줄기버섯들깨탕에 밤밥과 미역국이다.



식탁에 차려놓고 “밥 먹자.”불렀으나 K는 여전하다.
“놔두고 그냥 먹읍시다.”며 H씨와 식사를 마칠 무렵 K가 방에서 나왔다.
본래는 아침식사 끝나면 K는 독서실가고 우린 조조할인 영화를 볼 생각이었으나
아침이 늦기도 했고 어쩌겠냐고 H씨 묻기에 “그냥 갑시다.” 했다.
K에게 미역국과 밥을 퍼주고 나와 영화를 봤다. 만추.
“너무 뻔한 이야기, 지루했어. 시애틀 풍경이라도 좀 보여주던가.”라고 H씨는 불평했고
나는 “늙었나봐. K에게 ‘사랑이라고? 그깟 것에 목메지 마라’ 이런 얘길 해주고 싶은 영화였어.
그래서인지 그냥저냥 볼만하던데. 영화에서 교훈도 찾고 ㅋㅋㅋ” 했다.
‘그 놈의 사랑, 그깟 사랑에 기대지 말고 살면 안 되겠니! 얼마나 사랑에 기대다 넘어져야 정신 차릴래.
제발 온전한 삶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은 안타까움 마저 들게 했던 탕웨이와 현빈의 얘기.
길게 잡힌 엔딩신 때문에 ‘아 엠 쏘리, 내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아 엠 훈’ 하는 엔딩 대사가 나올까
살짝 조마조마하기도 했던 영화.
‘만일 엔딩 대사가 정말 그랬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것들로 기억에 남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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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오늘 아침은 잘 일어났니?
방학에 늦잠 자 버릇해서 힘들지나 않았는지…….
엄마한테 듣자니 어젯밤에도 새벽 1시 넘어 잔 모양인데.
항상 잠이 모자라는 네게, 고3인 네게 “일찍 자라.”는 말은 “공부해라”보다 짜증나는 말일 거 같아.
일요일 널 깨우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잘 받아들이면 좋은 습관이 되고 인생을 살며 덜 괴로워 할 수도 있는 팁이기도 한데.
‘인생은 선택’이란 말이야.
아침에 또는 네가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는 거? 그냥 일어나면 돼.
일어날지 말지, 5분 더 잘지 말지, 이런 거 고민하지 말고 그냥 일어나 버리면 돼. 아니면 그냥 자든지.
그걸 순식간에 선택하고 실천에 옮겨 버리면 아침에 일어나거나 그냥 푹 자기가 덜 괴로워.
설사 푹 자서 지각이나 벌점을 받는다면 그건 푹 자고 난 다음의 일이니 그때 책임지면 돼.
괜히 비몽사몽 자고 나중에 허둥댈 필요는 없다는 말이야.
가뜩이나 힘든 고3인데 결론과 답이 확연한 문제에서 괜한 고민으로 자신을 더 괴롭히지 말고
‘순식간에 선택’ 해버리는 거 괜찮지 않니. 어떻게 생각해?
살다보면 쿨하게 선택하면 될 걸 괜히 이것저것 따지고 혼자 괴로워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이 종종 있어.
어떤 것을 선택하든 스스로 책임지고 상처주지도 받지도 않는 삶을 산다는 마음만 있다면
나쁜 선택, 잘못된 선택이란 없는 거 같아.
왜냐면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
고3, 딸에게 푹 자도 된다니 무슨 아빠의 흰소린가 하려나?
아니면 공부하라는 말보다 더 무섭다 하려나?
둘 다 아니야. 살면서 갖추면 괜찮은 마음가짐에 관한 얘긴데. 어떻게 생각해?
오늘도 행복하렴. 배정된 기숙사 방은 어때? 바꿨니? 룸메는 누구야?


남은 나물로 만든 비빔밥과 오므라이스 삘의 뭐. ---> 재료는 같았으나 마무리는 딴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