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일찍 텃밭에 갔다. 고구마 심고 열무 뽑아 집에 오니 집이 텅 비어 있다.
H는 딸과 병원에 갔다. 아이가 지난달엔 생리를 두 번하더니 이번 달엔 2주째 한다고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저만할 땐 그럴 수 있어.” 하며 걱정하더니 병원에 간 모양이다.
‘시력 재본지 오래라며 안과도 들린다.’ 했으니 점심때나 오겠다.
모녀 오랜만에 외출했으니 지름신이 강림해 쇼핑삼매경에 빠지거나
수다 작렬해 어디 카페라도 눌러 앉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히 김치나 담자.’ 마음먹고 열무부터 씻어 소금에 쟀다.
찹쌀 풀 쑤고 마늘 다지고 양파 갈았다. 다시마 우린 물에 미리 고춧가루 풀어 소금 한주먹 넣고
액젓 조금 넣고 찹쌀 풀과 양념들을 잘 섞어 놓았다.
그럭저럭 숨이 죽고 절여진 열무 씻어 물기 뺄 무렵 H와 딸내미 들어오셨다.
특별한 이상은 아니고 ‘자궁내막이 두꺼워지며 그럴 수 있다.’고 주사 맞았다고 한다.
안과는 휴진이라 못 갔고 둘이 차 한 잔 마시고 왔단다.

내가 김치를 처음 담은 건 10년쯤 전이다. 그땐 양가에서 김치를 얻어다 먹는 게 기본이던 시절이었다.
아마 이 맘 때지 싶다. 김장김치는 떨어졌는데 김치 얻으러 가기엔 너무 먼 곳에 살았고 H는 바빴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김치 담아야 하는데…….’ 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나 혼자 있을 일이 있었고
인터넷 뒤져 유명 김치회사의 김치 담는 방법을 출력해 그대로 따라했던 기억이 있다.
내 첫 김치는 배추김치였다. 출력한 레시피 들고 마트서 배추와 파, 양파, 깐 마늘, 굵은 소금 따위를 샀고
집에 와 배추 다듬어 절여 놓고 양념 만들었다. 그땐 소금물에 배추를 담아 절였는데 배추 절이는데 애 먹었었다.
내 입맛에 짜다고 배추가 절여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무튼 서너 시간을 절여도 기죽지 않는 배추로 어찌어찌해서 김치를 담았고 맛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하다.
물론 H는 ‘내가 아주 괜찮은 머슴을 구했어!’ 하는 표정으로 마구마구 칭찬을 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게 아니란 걸.
대개의 음식이 처음엔 엄두도 안 나지만 막상하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김치도 그렇다. 일머리라고 해야 하나, 일하는 순서와 적절한 타이밍이 몸에 밸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첫 김치 이후, 본가 김장할 때 팔 걷어 부치고 양념 만들고 김치 속 넣는 것 해보며 어머니 손맛을 훔쳤고
집에서 몇 번 해보니 그 손맛이 몸에 익더라.
지금은 양가 모두 돌아가셔 철철이 가지가지 김치 가져가라 전화하시거나 택배로 보내오시는 분 없지만,
젓갈을 듬뿍 넣으시던 어머니 김치와 달리 젓갈은 일체 넣지 않고 액젓만 조금 넣는 걸로 김치 맛이 바뀌었지만
김장도 하고, 이맘때면 열무김치도 담을 줄 알고 더 더워지면 오이소박이, 고구마줄기 김치도 담을 줄 안다.
김치 해먹는 거 어머니 보셨으면 “기특하다.” 하셨을 거다.
김치 맛 보셨으면 “깔끔하니 개운하다.”하셨을 거다.

물기 빠진 열무, 양념 든 큰 함지에 넣고 버무렸다. ‘미나리를 좀 넣을 걸!’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남는다.
하지만 맛있다. 세 식구 이정도면 여름 김치 걱정 없겠다.
양가 부모님 계셨으면 ‘맛보시라.’ 한통씩 더 담아 보내드리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