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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우렁각시 놀이 - 김치담기

| 조회수 : 9,528 | 추천수 : 186
작성일 : 2010-05-25 11:29:51
텃밭의 열무 뽑아 김치 담았다.
토요일 아침 일찍 텃밭에 갔다. 고구마 심고 열무 뽑아 집에 오니 집이 텅 비어 있다.

H는 딸과 병원에 갔다. 아이가 지난달엔 생리를 두 번하더니 이번 달엔 2주째 한다고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저만할 땐 그럴 수 있어.” 하며 걱정하더니 병원에 간 모양이다.
‘시력 재본지 오래라며 안과도 들린다.’ 했으니 점심때나 오겠다.
모녀 오랜만에 외출했으니 지름신이 강림해 쇼핑삼매경에 빠지거나
수다 작렬해 어디 카페라도 눌러 앉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가히 김치나 담자.’ 마음먹고 열무부터 씻어 소금에 쟀다.
찹쌀 풀 쑤고 마늘 다지고 양파 갈았다. 다시마 우린 물에 미리 고춧가루 풀어 소금 한주먹 넣고
액젓 조금 넣고 찹쌀 풀과 양념들을 잘 섞어 놓았다.

그럭저럭 숨이 죽고 절여진 열무 씻어 물기 뺄 무렵 H와 딸내미 들어오셨다.
특별한 이상은 아니고 ‘자궁내막이 두꺼워지며 그럴 수 있다.’고 주사 맞았다고 한다.
안과는 휴진이라 못 갔고 둘이 차 한 잔 마시고 왔단다.



내가 김치를 처음 담은 건 10년쯤 전이다. 그땐 양가에서 김치를 얻어다 먹는 게 기본이던 시절이었다.
아마 이 맘 때지 싶다. 김장김치는 떨어졌는데 김치 얻으러 가기엔 너무 먼 곳에 살았고 H는 바빴다.
식탁에 앉을 때마다 ‘김치 담아야 하는데…….’ 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나 혼자 있을 일이 있었고
인터넷 뒤져 유명 김치회사의 김치 담는 방법을 출력해 그대로 따라했던 기억이 있다.

내 첫 김치는 배추김치였다. 출력한 레시피 들고 마트서 배추와 파, 양파, 깐 마늘, 굵은 소금 따위를 샀고
집에 와 배추 다듬어 절여 놓고 양념 만들었다. 그땐 소금물에 배추를 담아 절였는데 배추 절이는데 애 먹었었다.
내 입맛에 짜다고 배추가 절여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무튼 서너 시간을 절여도 기죽지 않는 배추로 어찌어찌해서 김치를 담았고 맛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듯하다.
물론 H는 ‘내가 아주 괜찮은 머슴을 구했어!’ 하는 표정으로 마구마구 칭찬을 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게 아니란 걸.

대개의 음식이 처음엔 엄두도 안 나지만 막상하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김치도 그렇다. 일머리라고 해야 하나, 일하는 순서와 적절한 타이밍이 몸에 밸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첫 김치 이후, 본가 김장할 때 팔 걷어 부치고 양념 만들고 김치 속 넣는 것 해보며 어머니 손맛을 훔쳤고
집에서 몇 번 해보니 그 손맛이 몸에 익더라.

지금은 양가 모두 돌아가셔 철철이 가지가지 김치 가져가라 전화하시거나 택배로 보내오시는 분 없지만,
젓갈을 듬뿍 넣으시던 어머니 김치와 달리 젓갈은 일체 넣지 않고 액젓만 조금 넣는 걸로 김치 맛이 바뀌었지만
김장도 하고, 이맘때면 열무김치도 담을 줄 알고 더 더워지면 오이소박이, 고구마줄기 김치도 담을 줄 안다.
김치 해먹는 거 어머니 보셨으면 “기특하다.” 하셨을 거다.
김치 맛 보셨으면 “깔끔하니 개운하다.”하셨을 거다.



물기 빠진 열무, 양념 든 큰 함지에 넣고 버무렸다. ‘미나리를 좀 넣을 걸!’ 하는 아쉬움이 뒤늦게 남는다.
하지만 맛있다. 세 식구 이정도면 여름 김치 걱정 없겠다.
양가 부모님 계셨으면 ‘맛보시라.’ 한통씩 더 담아 보내드리련만.
1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ribbonstuffie
    '10.5.25 12:01 PM - 삭제된댓글

    유능한 남편분 두신 H씨는 행복하시겠어요.

    "그때 알았어야 했다. 칭찬은 고래만 춤추게 하는 게 아니란 걸."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 어중간한와이푸
    '10.5.25 12:11 PM

    K양... 가끔씩 그럴때가 있더라구요. 그 나이에는요.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있는 L양을 가진 맘입니다.
    수필 한자락을 읽고있는 듯한 글솜씨와 담백한 음식들이 상당히 매력이 있으십니다.^^

  • 3. 미나리
    '10.5.25 12:23 PM

    오후에 님 한테 김치강습 받고 싶어요~~
    섬세하고 멋진 분이세요.

  • 4. 초록하늘
    '10.5.25 1:19 PM

    처음 김치하고 스스로 얼마나 대견하던지...
    그 이후 82회원님들과 여러분들의 레시피를 섭렵하며
    점점 더 맛난 레시피로 김치를 만들고 있죠..

    글솜씨 만큼이나 김치도 맛나보이네요.. ^^

  • 5. elgatoazul
    '10.5.25 2:44 PM

    우와 오후에님 글 정말 재미있어요.
    자주자주 올려주세요. 히히

  • 6. 미주
    '10.5.25 2:56 PM

    스트레스 받아 생리가 불규칙한 딸아이 안쓰럽고
    부모님에 대한 마음 뭉클하고
    저 맛나게 보이는 열무지 또한 그만입니다.

  • 7. 영이
    '10.5.25 2:58 PM

    정녕... 오후에님이 남자란 말씀인가요?
    정말인가요?....???

    저 아직 미혼인데,,,, 저런 분 만나고 싶어요....!!!!!!!!
    (꼭 음식을 해줘서가 아니라, 쓰신 글들을 보면... 너무 다정하실 거 같아요...^^)

    종종 글 올려주세요~~

  • 8. 오후에
    '10.5.25 5:06 PM

    '호호님'
    ㅋㅋ 좋은게 있음 부족한 것도 있죠. 그리 부러워 안하셔도 될듯...

    '리본님'
    그땐 그 책이 없었죠 그래서 그 엄청난 비밀을 몰랐어요... 흑흑~

    '어중간님'
    그 질풍노도 얼릉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합니다.

    '미나리님'
    뭐 강습씩이나 그냥 담아보면 된답니다. 감사

    '초록님'
    마자요 저도 김치담고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했어요

    '이갈님' '미주님'
    좋게 봐주셔 고마워요. 별볼것 없는 거 자주 올린다 뭐라하지 마시길..ㅎㅎ

    '영이님'
    남자란 사실에 너무 방점을 찍지마옵소서...

  • 9. 순덕이엄마
    '10.5.25 6:17 PM

    위의 자취남 님과 함께 "키톡 7대 옵하" 인증서 드립니다.
    82쿡 본사로 오셔서 찾아가세요.
    주소는...에.. 스스로 알아서 =3=3=3

  • 10. 좌충우돌 맘
    '10.5.26 3:22 AM

    에고에고....

    저희집에도 우렁각시 보내주세요!!!!

    추르름 연신 침이 고이네요.

    그나저나 우리집 김치도 떨어졌는데....

    저희집 교주는 언제쯤이나 이런 이벤트를 해 주려나...

    왠지 뒤통수가 오늘따라 이리 미운지....

    그나저나 H님 부럽사와요!!!!

  • 11. 링고
    '10.5.26 3:35 AM

    오후에님은 음식올리신 사진만 봐서는 전혀 남자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살림 오래 하신 주부님같으세요.
    부인과 따님은 참 행복할거 같아요.
    따님 도시락준비하신거 보고 남성분이란게 믿기지 않았는데
    오늘 김치올리신 거 보고는 더더욱 깜놀이네요 ^^
    환상입니다.
    요리하는 아빠!!! 하면서 나중에 요리책 내시는 거 아닌가 몰라요.
    가끔 요리한답시고 제 주방을 어지

  • 12. 시네라리아
    '10.5.26 9:27 AM

    저도 오늘은 열무를 담가야 할듯 싶어요~~

  • 13. 가끔은 제정신이기도.
    '10.5.26 10:24 AM

    우렁서방님 하나 구해달라고 댓글달고 클릭했더니
    오잉??????????사용권한이 없다네...
    이런 ...잠깐 수다떨고 댓글달았더니 로그아웃되어버렸나바요..
    솥뚜껑운전 20년 한 이 불량주부 두손들고 반성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우렁서방님 구해주시면 펴엉~~~~~~생 은인으로~~~~~~~~~~~~
    이러다 정작 있는서방한테 뼈도 못추리지 싶기도 하고 ..ㅎㅎ
    행복한 모습이 글읽는 내내 묻어나는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 14. 오후에
    '10.5.26 5:15 PM

    순덕엄마님, '7대옵하'로 꼽아주시니 감사하나 왠지 옵하는 사양하고픈... 동상이라면 모를까

    좌충우돌맘님, 제경험으로 봤을때 우렁신랑은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댁 교주 뒤통수 너무 미워마시고 잘 다듬으면 훌륭한 우렁각시로 거듭나실겝니다.

    링고님, 느껴지지 않는 남자의 향기 신경쓰지 마시옵소서 그냥 먹고사는 이야기 끄적이는 겁니다. 그리고 칭찬 많이 하시면 좋은일 있을겁니다.

    시네님, 열무 담으셨어요?

    가끔제정신님, 감사... 수다떨다 댓글 달면 로그아웃되는거군요 ㅎㅎ. 사실 수다는 우리모두의 힘이죠.

  • 15. 잠오나공주
    '10.5.27 8:25 AM

    제가 오후에님 10년전 상황이네요..
    요즘 김치만들기를 했거든요..
    아직 제대로된 배추김치는 못만들었지만.. 겉절이 만든거.. W에게 칭찬받고..
    나박김치 우리꼬마 H군이 잘 먹어주고해서..
    요즘 재미 붙었어요..
    몰랐는데.. 우리 W는 깍두기를 안좋아하더라구요.. 몰랐어요..ㅠ.ㅠ
    한 통 담갔는데 저혼자 열심히 먹거나 김치는 깍두기 하나 달랑 올려서 먹으라고 강요도 한답니다..

    10년후엔 저도 오후에님처럼 때마다 이거저거 담게 되겠죠??
    흐흐흐흐... 생각만 해도 침이 흐르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흐흐흐... 쓰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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