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누구나 그런 건지..아니면 제가 유난히 그런 건지...
제게는 남들이 알면 웃어넘길...그런 유치한 구석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무엇보다 중요한 건데, 그런 내면의 아름다움 보다는 거죽 치장에 신경쓰는 그런 치기...
회사에 다닐 때...
종이 원고지에 기사를 쓰던 시절, 볼펜을 꼬옥 쥐고 기사 쓰느라 손을 오그리고 있어 손톱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책상에서 종이 원고지가 사라지고, 키보드가 놓이면서, 손가락을 펴고 자판을 두드리다보니 자꾸 손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꿈꾸는 제 손가락은 하얗고 길고 손톱은 잘 정리되어 예쁜 색깔의 매니큐어가 발라져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쁜 손가락이 자판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좋은 글을 빨리 많이 써내는, 능력있는 기자...
남들이 저를 그렇게 봐줬으면 하는..., 그런 철딱서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글을 잘 쓰는 건 접어두고라도,
불행하게도 제 손가락은 하얗지도, 길고 예쁘지도 않았습니다.
집안일을 그렇게 많이 하는 편도 아닌데, 손가락은 굵고 마디는 두꺼우며 다른 피부색보다 훨씬 검고 미웠습니다.
손이 예쁘지 않을 때 빨강색 매니큐어를 바르면 손이 깨끗하고 예뻐 보인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가지고,
한때 제 취미가 매니큐어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새빨간 색으로...
새빨간 손톱으로 글을 쓰면 괜히 멋있어 보일 것 같다는..생각을 했다는...
그런데 자판을 치는 제 타법이 문제가 있는 건지, 아니면 매일 아침 머리를 감을 때마다 손톱으로 두피를 벅벅 문지르는 탓인지,
매니큐어를 발라봐야, 한나절도 못가서 벗겨지기 일쑤였습니다.
게다가 시간에 쫓기는 관계로 충분히 말리지 못해서 밀리기도 하구요.
회사를 그만 두기 3~4년전부터는 회사에서 아침마다 매니큐어를 발랐습니다.
남들보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해서 그날 해야할 일들을 정리하면서 매니큐어를 발랐습니다.
물론 매니큐어를 바르기 위해서 일찍 출근한 것은 아니고,
어차피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야하니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남자동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마음놓고 매니큐어를 바른 거죠.
매니큐어를 바르고, 그것이 뭉개질세라 조심해서 자동판매기의 커피를 뽑아 한잔 마시면서,
중앙 일간지, 경제지, 스포츠지도 모두 한번 훑어보며 뭐 물먹은 건 없는 지 살피는 것이 그날 업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책상위에는 여러가지 색깔의 매니큐어와 네일리무버가 항상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7월에 회사를 그만 두면서...매니큐어 바르는 습관이 없어졌습니다.
자판을 빨간 손톱으로 두드릴 일도 없었고, 또 집에 있어보니 회사 다닐 때보다 오히려 매니큐어 바를 시간이 더 없었습니다.
며칠전...베란다의 잡동사니를 정리하던 kimys, 쇼핑백 하나를 들고 들어오더니,
"이거 웬만하면 좀 정리해서 버리지!!" 하는 거에요.
뭔가 하고 보니까, 회사 그만두면서 싸가지고 들어온, 명함이며 가위,포스트잇, 자 등 쓰던 사무용품이 들어있는 보따리 였습니다.
회사에 명퇴바람이 불기시작했을 때, 명예퇴직을 자원하기는 했지만 자의가 70%라면 나머지 30%는 타의도 섞여있어,
100% 자의는 아니었다는 그 아쉬움 때문에 7년이 되도록, 회사에서 들고들어온 보따리를 여지껏 풀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그 보따리에서...사무용품들과 함께 나온 매니큐어들...하나하나 열어보니, 아직 쓸만한 것도 있고, 못쓰게 굳어버린 것도 있는 거에요.
뚜껑이 열리는 걸 하나 손톱에 발라보니...당시 제가 입었던 옷, 제 메이크업, 제 헤어스타일이 하나하나 다 기억나는 거 있죠?
구불구불 퍼머를 한 머리는 손질이 쉽게 양쪽으로 핀을 꽂고,
하얀색 파운데이션을 바른 얼굴은 입술을 새빨갛게 발라 생기있어 보이게 하고,
그리고 활동적이면서도 여성스러워 보이도록 바지나 롱스커트에 니트나 셔츠블라우스를 받쳐입고...
그런데, 그게 벌써 7년도 더 전의 일이라니...
뭐 꼭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회사를 퇴직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거나 하는 건 아닌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싸한 것이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아요.
그게 뭘까, 20년 이상 몸담던 곳에서 끝장을 보지 못한 아쉬움일까...

음식 만드는 사람이 매니큐어라니...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지만....오늘도 매니큐어를 발랐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이거 지우고 새빨간 거 바르고, 저녁밥 할 때는 또 지우고..밤에 다른 색 또 발라볼거에요..^^
몇년동안 잊고있던 과거의 취미생활 며칠만 즐겨보려구요.
그리고, 이 매니큐어가 들어있던 보따리 말고도 남아 있는, 아직도 못풀고 있는 회사소지품 보따리, 이제는 마저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울 건 지우고, 잊을 건 잊고...
비록 매니큐어는 매일 바르지 못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지금 얼마나 행복한 지...,
매니큐어 때문에 옛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 도달한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