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 장롱위에서 먼지에 덮여있던 그림들..
그중에서 꼭 한점은 찾아내 걸고 싶었는데...하나를 찾자고 온 집안을 먼지구덩이로, 그것도 제 집이 아니고, 친정집을...
먼지구덩이로 만들 수 없어 참았더랬습니다.
그랬는데...친정 동네, 얼마전부터 재건축 얘기가 쏠쏠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재건축 얘기가 나오면서 친정어머니께서는 버릴 물건들은 버리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건 물려주며 짐을 정리하고픈 눈치...
아...그림을 다 가져와야겠구나...하고 벼르다가..
오늘 큰 맘먹고...그림을 다 가져다가 다시 포장하고, 거죽에 작가와 작품이름 적고...
아주 큰 일 했습니다.
집안의 그림까지 싹 다 바꿔 걸고....그동안 너무나 걸고싶어 했던 그림을 제일 먼저 걸었죠.
오늘은 그림 이야기 입니다.

언젠가도 잠깐 쓴 적이 있는데...제가 1989년부터 1992년(93년?)까지..문화부에서 미술담당기자를 했었습니다.
참 좋은 그림을 많이 보고 다니며 눈호사를 한껏 했었습니다.
제가 미술기자를 막 시작했을 1989년은...사춘기도 아니면서도...제 나름대로는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
뭐 하나 안정된 것이 없고....늘 쫓기는 것 같고...가정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나의 내일은 너무 불확실하고..,
내게 지워지는 책임은 너무나 무거워서...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그렇다고 회피할 수는 더더욱 없고...
제 속에서는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는, 정확하게 알 수도 없는 감정들...불안, 혼란, 분노, 슬픔...뭐 이런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서...
늘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에 있는 미술관(지금은..없죠??)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을 보러 갔습니다.
한 30점쯤...작품이 걸렸는데..그중 한 작품이 제 눈에 화~악 들어왔습니다.
그 그림 때문에...다른 그림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고 이렇게 그렸을까...긴 한숨을 저절로 내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검고 푸른, 별이 떠있는 밤,
벼랑 끝에 서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바윗덩이를 끌어안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사람.
바위는 벼랑 밖으로 조금 나가 있어 조마조마하기만 하고...
낭떠러지 저 아래의 아파트에는 많은 이들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듯,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데....
이 사람, 어쩌자는 건지...어쩌려는 건지....
당시, 벼랑 끝에서 위태위태 서있는 것 같은... 제 모습인 듯 했습니다.
작가는 제목을 '몽상가'라 붙였지만....
몽상가라기 보다는 버틸 수 있는 한계점에 까지 다다른 저를 그린...제 초상화로 보였습니다, 제 눈에는 요.
그림을 보고...회사로 돌아온 후에도..그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온통 그 그림만 생각나고...그 그림을 꼭 가져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며칠 뒤 다시...미술관을 가서, 관장님에게...그냥 농담처럼....
"저 그림...꼭 제 초상화 같아요...그래서..제가 가져야할 것 같아요..." 라며...가격을 물었습니다.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값...1백50만원...지금도 적은 돈이 아니지만...그때는 더욱 거금이었습니다.
사겠다고 하니까...
관장님 말씀이..."일간신문의 미술기자가 그림을 사겠다고 하면 작가도 좋아할 것"이라며 가격은 절충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작가가 흔쾌하게 깎아줘서...처음 가격보다야 싸게 샀지만...
뭐, 그래도 월급쟁이가 그냥 주머니에서 턱 꺼내기에는 제법 큰 돈을 주고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산 첫 그림이었습니다.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배달받아서, 제 방에 걸어놓고....회사 갈 때 한 번 보고, 회사에서 돌아와서 한 번 보고...
그런데 참 재밌는 건....
처음에는 '저 사람, 곧 저기서 떨어져 죽을 것 같아, 저 담배나 다 피울 수 있으려나...'였는데...
한달 두달 자꾸만 보니까,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은 저 벼랑 끝에 앉아서, 위태로움을 즐기면서, 뭔가 새로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그렇다면....몽상가가 맞는거죠...
처음 샀을 때는 하늘색도 거의 검은색으로 보였고, 그 사람 옆에 있지도 않은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자꾸 보니까..하늘색도 검은색이 아닌 푸른색이었고, 그 사람 옆에는 담배꽁초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거짓말처럼...제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그렇게 혼란스럽던 제 위치가....뭔가 정리되면서...차분하게 자리잡았었습니다.
꼭 저 그림 때문은 아니었겠지요...제가 속앓이를 할 만큼 했기 때문에 털고 일어난 것이겠지요..
그렇지만...전 꼭 저 그림 때문인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이 그림에 더욱 애착이 갑니다.
이흥덕선생님...저, 이 그림, 잘 갖고 있어요.
잠시 떼어놓기는 했지만....맘 속에는 항상 같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걸어보니...역시 너무 좋네요...
그리고 오늘 보니까..이 남자 빙그레 웃는 것도 같네요..첨에 봤을 때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잘 지내시죠? 요즘도..여전히 좋은 작품 하고 계시죠?? 다음에 전시회에 하시면...꼭 가서 볼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