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 극복이 취미인 국민에게 찾아 온 역병입니다.
이제 질병 극복도 특기로 함 키워 보라는 의미인가 봅니다.
개뿔입니다.
똥차는 달려도, 꽃 개는 짖듯이,
시절은 하수상해도.
꽃은 피어 내고, 시간은 제 갈 길을 갑니다.
지난 겨울,
이 부엌 바닥에서 끄적거린 문자 그대로 #키친,#테이블,#노블..을 풀어 볼까 합니다.
바라건대, 결말에 다다를 즈음엔 역병극복 특기병으로 거듭나 있기를..
#근본 없는 소설, #이래봬도 추리소설, #싫으면패쑤
안개로 빽빽한 산책길
요새 추리소설을 읽는 나는 살인사건을 생각하며 걸었다.
...그 아침, 안개는 새벽부터 피워대었던 노인의 담배연기를 죄다 모아다가 풀어 놓은 듯 무성했다.
밑으로만 가라앉는 것도, 클클거리며 부시럭거리는 것도 그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출근에 나섰다.
한 걸음 내 딛는 바로 앞 땅마저도 안개에 묻혀, 거리 사람들은 모두 발목없이 걸어 다니는 유령같았다...
라고, 머릿 속으로 써 내려 가다가, 그 글이 시체를 만나기 전에 잽싸게 돌아 왔다.
살아 보지 않아도 알 것같은, 그런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페어팩스에서 워싱턴 디씨로 가는 메트로를 타고 출근을 한다.
이년전부터, 봉사를 하던 단체에서 알게 된 정변호사의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메트로는 오래되어 낡았지만, 깨끗하고, 조용하다.
바깥은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뿌옇기만 하다.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전철 창밖을 내다 보았다.
이제 곧 전철이 지하로 내려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일부러 스포일러부터 찾아서 읽고 시작한다.
결말을 알고 나면,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매 순간을 아끼며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운을 앞두고 묘사되는 주인공의 일상 행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배우 얼굴에 퍼지는 웃음, 펼쳐진 잔잔한 풍경 그리고 흐르는 음악은 또 얼마나 듣기 좋은지 말이다.
최대치로 집약된 그 노곤한 행복에 관한 묘사가 애틋해서 쓸쓸하다.
그들이 느끼는 것을, 그들의 뒤로 펼쳐진 일상의 풍경을 그대로 흡수하고 싶다.
그 감정들을 쟁여 놓았다가, 앞으로 닥칠 불행 앞에서 벗어날 길 없어 괴로울 때, 하나씩 모닥불로 틔우게 말이다.
힘들게 만나 해내고 말았던 결혼이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나 역시, 전남편과 매 순간을 즐기며 달달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아니다..하며 저절로 머리가 내 저어졌다.
일하는 곳은 디씨의 오래된 구역에 있었다.
모든 것은 낡았으나, 전철역이 근처에 있었고, 잘 관리되고 정돈되어 아름다웠다.
그런 만큼 렌트비가 비싸서, 로펌 사무실로 들어오는 수입의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 변호사가 이 사무실을 유지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곳은 모든 네트워크가 모여 있어, 그의 꿈을 이룰 베이스캠프로 적합하다.
그는 이 곳을 기반으로 모든 일들을 조금씩 했고, 그 조금씩 한 모든 것은 그의 이력에 한 줄이 되어 스펙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가 조금씩 한 그 모든 일의 나머지 부분, 즉 여집합을 담당하는 변호사로 그를 보조한다.
자질구레 일이 많으나, 상대적으로 쉽고, 티가 안나는 것들은 모두 내 몫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생각과 달리, 무한하지 않았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고비들을 하나 둘씩 넘다 보면, 기술이 늘어 난다.
일이 벌어졌고, 내게 닥쳤으니, 어떻게든 해결하고 본다.
그러나, 갈수록 기계처럼 반응하며, 해낼수록 향상되는 처리능력에 비해서, 마음은 그에 따라가지 못 했다.
나는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감정들을 써 버린 거 같았다.
설렘도, 마음 졸임도, 기쁨도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도.
평생 동안 사람이 사용해야 할 희로애락의 양도 주어진 시간처럼 유한하다는 걸, 겁없이 많이도 써 버린 후에야 알았다.
새로 적립되는 자금 하나 없이, 마이너스 상태로 신용불량이 되어 버린 사람은 일생동안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채워지지 않은 채, 방전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사람은 일생동안 허덕인다.
고갈된 부분을 나머지 생애동안 꾸역꾸역 메꾸어 가야만 한다.
건조하게 말이다.
그래서, 꿈 많고 부지런한 이민 1.5세인 정 변호사와의 동업은 내게도 속 편한 일이었다.
나는 감정을 그리 많이 소모하지 않고, 그의 공사다망한 일상 뒤편에 앉아 조용히 일만 하면 되니까.
일을 하다가, 창 밖의 나무나 가끔씩 쳐다보면 되니까.
사무실 문을 열려 손을 뻗자, 정 변호사가 반대편에서 문을 먼저 활짝 열며 나를 반긴다.
날 기다렸다며, 눈을 반짝이는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 변호사, 우리 정변이 역변이 되는 순간이다.
이럴 때마다 불길했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정변을 나도 가볍게 응대했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구석진 안쪽 창가에 있는 내 책상으로 갔다.
머리도 네모, 몸매도 네모라서, 직사각형을 세로 세워둔 듯한 레고형 몸매를 가진 정변이 곧 따라 들어 왔다.
레고이긴 한데, 커다란 교포버젼 곰형이기도 한 정변이 온 몸으로 용건이 있다고 티를 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러면, 상당히 큰 껀인데'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무심하게 외투를 벗어 걸고, 의자에 앉았다.
그가 조용히 지켜보다가, 내 책상에 따라 걸터 앉는다.
"정변"
싱글거리는 그를 힐끗보며 조용히 불렀다.
"책상, 뽀개져"
그가 얼른 벌떡 일어나자,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정변이 자기 자리로 가 버릴 때까지, 쳐다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보통 내가 이리 나오면, 정변은 참지 못하고, 주절주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그가 또 오지랖 넓게 수임해 온, 아무도 안 맡는 케이스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사건들은 도대체 돈도 안되고, 법적인 논쟁거리가 아닌, 막막하고 답답한 것들이 많았다.
정변은 남들이 꺼리는 케이스야말로 우리에게 적합함을 역설했다.
우리가 도우면, 얼마나 보람 찬 일이며, 궁극에 이 로펌의 돈과 명예 축적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를 설득하는 것이 장차 그가 마주 칠 냉담한 유권자들을 상대로 한 연습인 거처럼, 그는 열과 성의를 다했다.
그가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온 그에게, 각가지 컨템퍼러리 한국말을 가르친 것을 후회했었다.
그러던 그가 오늘은 조금 다르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나를 내려다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요번 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정변은 가끔 역변은 해도, 대부분 조변이고, 드물게 울변인데, 이번에는 광변인가? 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정변은 쉽게 물러 날 생각이 없는듯, 버티고 서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저 당당함으로 보아. 영업이다.
나의 주말까지 갈아 넣는 걸 보니, 놓치지 말아야 할 커다란 인맥이기도 하고 말이다.
보통 이런 소규모의 로펌은 한 달에 한 방, 즉, 제대로 돈이 될만 한 케이스를 하나만 수임해도 운영된다.
이번 달은 아직 그 한방 분량의 케이스를 수임하지 못했다.
그래도, 주말이라니.
내 표정이 복잡해지자, 정변이 "쎄라?" 하고 나직이 불렀다.
묵묵부답인 나를 다시, '사라?'라고 부른다.
피곤이 몰려 온다.
정변은 끼었던 팔장을 풀고, 내 쪽으로 한 걸음 옮기며, 쐐기를 박는 마지막 호칭으로 나를 부른다.
"접시!"
간다. 가.
"정변, 언제 결혼하니? 영업은 원래 와이프랑 뛰는 거야. 예원씨랑은..."
말을 끝 마치기도 전에, 그가 잘랐다. 헤어졌다고.
정체성이 과도하게 과도기인 이민 1.5세인 우리 정변의 연애사는 굴곡졌다.
따로 노는 그의 언어와 정서가 문제였다.
미국여자랑 사귀면, 언어는 통하지만, 그의 갬성을 이해 받지 못하고,
한국여자랑 사귀면, 그의 정서는 공유되지만, 그가 하는 영어적 표현의 어눌한 한국어를 이해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여자와 미국여자를 번갈아 사귀면서, 번갈아 그들에게 채이고 있었다.
주말에도 쉬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울적해져서, 그에게 한 마디를 날린다.
"정변네 이민 올 때, 김포평야에 땅 많던 거..안 팔고, 고대로 두고 온 거. 예원씨한테 내가 슬쩍 흘릴까?"
김포평야에서 그는 이미 내 방을 나가고 없었다.
# 세라, #첫째딸, #버지니아 페어팩스, #파트너는 정변호사, #그는_지_웬수
*사진과 글은 전부 제가 찍고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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