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큰 집만 가면 나는 밥을 못 먹었다. 밥은 보리밥이고 김치는 왜 그리 시고 군내도 나는지,
맛도 맛이었지만 ‘시골냄새’라고 부르던 묘한 냄새 때문에 더욱 밥 먹기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기도 없는 시골에서
설 지난 2월이면 김치가 시고 무르고 군내 나는 게 당연한 일이고 볏짚으로 밥을 하고 난방을 했으니,
또 소죽도 같이 끓이던 부엌이었으니 그 비릿한 볏짚 냄새며 탄내들이 음식에 배는 게 당연했으나
도시 아이인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그저 큰 엄마는 음식 솜씨가 없는 줄만 알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시골집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사촌 큰형 결혼하고 어느 날 큰집에 갔는데
음식이 달라져 있었다. 그 땐 그랬다. ‘오호! 형수 솜씨가 좋은가 보다.’
그 후 흐르는 세월만큼 큰 집의 음식은 맛있어졌다. 마치 내 어머니 손맛인 듯 입에 맞아 갔다.
다시 세월이 흘러 직장 때문에 여기저기 출장도 다니게 되고 몇 몇 지방에 살아보니,
해가 바뀔수록 ‘우리 집 음식’ 같은 맛이 많아지고 음식들이 비슷비슷해졌다.
비단 식당뿐 아니라 집 밥마저도 그랬다. 매워지고 고기든 음식이 많아지고 달아 지는 것도 비슷했다.
콩나물국을 끓일 때면 어머니 손맛을 생각한다.
아무리 흉내 내도 기억속의 그 맛이 안 나오는 음식이 내겐 콩나물이다.
그래도 무침은 좀 나은 편인데 콩나물국은 다시마로 따로 국물을 내어 봐도 안 되고
간장을 바꿔 봐도 안 되고 애꿎은 다진 마늘 잔뜩 넣어도 그 맛이 안 난다.
유일하게 그 맛을 흉내 낼 수 있는 방법은 조미료를 쓰는 것뿐이다.
옛날 마법의 맛을 내는 ‘味’자 돌림의 형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김혜자 아줌마가 선전하던 味자 제품을 즐겨 쓰셨는지 다른 이가 선전하던 제품을 쓰셨는지,
또 얼마나 많이 쓰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 우리 집에도 그 味자 형제들이 떨어지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80년대 후반 이후 급격히 모든 집의 김치 맛이 같아졌던 거,
시골 큰 집의 음식이 맛있어졌던 건 형수의 음식 솜씨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콩나물국이라기에는 국물이 적고 무침이라기엔 국물이 자박한
국도 무침도 아닌 콩나물이 상에 올라오면 3남매 참 열심히 먹었던 기억이 있다.
비교적 매운 걸 잘 못 먹던 나와 동생을 위해 해주시던 음식이었다.
게다가 귀한 참기름과 깨소금까지 얹어 상에 올라오는 날이면 말이 필요 없는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며 끓인 국물 자박한 콩나물 무침이다. 역시 다시마 우린 물에 콩나물 끓이다 다진 마늘 넣고
소금으로 간하고 파도 썰어 넣었으나 어머니 손맛과는 하늘과 땅차이다.
깨와 참기름도 한 방울 떨어뜨렸으나 오히려 맛을 버렸다.
할 수 없이 채식조미료 좀 넣는다. 이제 맛이 비슷해졌다.
어머니 손맛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어머니 손맛의 비밀은 정성과 사랑 솜씨 말고 또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가끔 국물 요리를 하다보면 기억속의 맛, 원하던 맛이 안 날 때가 있다.
이럴 땐 별수 없다. 그냥 조미료 쓸 수밖에. 왜냐? 어머니도 그러셨으니까……. ㅎㅎ.
그런데 그 味자 형제들이 언제부터 집에서 사라졌을까? 그럼 그들을 대신하고 있는 건 지금 뭐지?
음식만큼 제 각각의 맛과 선호가 분명한 것도 드물다. 그만큼 경험에 의한 편견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K가 초등학생 때까지 아이에게 말했다. “원래 맛있는 음식은 없다. 맛있게 먹는 음식만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무엇이든 편견 갖지 말고 잘 먹으라고.
그럼 아이는 “맛있는 음식 있어, 내 입에 맛있는 게 맛있는 음식이야!”고 대들었다.
내말도 아이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새로운 맛을 쫓지 않길 바랄 뿐이다.
자신의 기호를 다른 이에게 잣대로 들이대는 우를 범하지 않고 살길 바랄뿐이다.
------------------------------------------------------------------------------------


당근과 양파를 갈어 넣고 반죽한 수제비, 색이 야시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