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국을 먹느라 바빴다.
혀 안에서 쉽게 무너지는 토란이 더 이상 물컹해서 싫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입 안의 혀가 감촉하는 맛이 다가 아니라니,
살다살다 머리나 가슴으로 기억하는 맛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니,
그건 어쩐지 기묘해지는 것이었다.
아이고나 J 가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여거 좀 보래이. 밥 한 그릇 벌써 뚝딱했네.
세상에, 그러니까 니가 키가 이렇게 크구나아.
J 야, 한 그릇 더 먹어라 어? 더 먹어.
부엌에선 J 녀석 먹성을 놓고 주거니 받거니 칭찬이 이어졌고,
약간의 호들갑이 섞인 할머니들의 칭찬은 문지방을 넘어 방 안의 밥상머리까지 찰지게 했다.
하기야...
지가 토란을 아나, 탕국을 아나, 녹두전을 아나, 차례 상의 면면이 괴상하고 낯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차마 젓가락은 못 대고 제 앞에 할당된 밥그릇이나 일단 비우고 보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밥이라고 느려 터지게 먹어서 내 속을 터지게 하는 녀석인데, 자식, 모로 굴러 서울 갔다 싶었다.
아 정말, 숨쉬기도 힘들다.
진짜 잘 먹데. 그래도 얼굴 좋아졌다고 다들 좋아하셨어.
근데 그분, 작은 숙모님 맞지.
응. 왜?
좀 여리여리하시지 않았나.
그러셨지.
그리고 그 옆에 계신 분은..
막내 숙모.
맞는데. 그 숙모님도 어딘가 모르게 좀 달라지셨던데...
그 뿐, 남편은 그대로 말을 닫았다.
...무디기로는 동급최강인 여보세요,
당신이 감지한 건 용모 따위가 아니라 시간입네다.
세월이란 말이어요. 아시겠어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실은 내가 그랬다.
다시 만난 가족들에게서 너무 짙게 밴 세월을 봤다.
작은 엄마의 여릿하던 머리카락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참 크기도 컸고 호기심 초롱하던 막내 작은 엄마 눈가엔 안경테를 씌우게 하고
만사 낙천이시던 성격만큼이나 모난 데 없이 둥글던 할머니 얼굴을
당신 증손주 주먹만 하게 줄여버린 시간의 그림자를...
엄마 간식 좀 있어?
간식? 응...과일 있고, 할머니가 주신 과자도 있..
과자랑 과일.
알았어.
한국은 왜 이렇게 사과가 커?
한국 사과가 큰 게 아니라 이렇게 큰 사과가 있는 거지. 추석 때니까 특별히 큰 걸 팔았나 봐.
근데 사과는 이따가 먹고 바나나부터 먹어야겠다. 좀 있음 다 물러버리겠네.
엄마 왜 웃어?
아니..
왜.
아니, 이게 웨하스잖아. 아니, 이게 웨하스거든.
근데 사실 그런 말은 없거든. 아니, 없다기보다도..
그러니까 엄마 어릴 땐 이걸 웨하스라고 했는데 그게 아닌 거 있지.
웨이퍼 말야?
응. 근데 그땐 다 웨하스라고 그랬어.
왜 웨이퍼가 웨하스가 됐어?
그러게 말이다...어서 먹어. 너 좋겠다. 할머니께서 주신 과자 많아서.
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토란, 웨이퍼, 아니 웨하스
blogless |
조회수 : 3,871 |
추천수 : 81
작성일 : 2009-10-07 19: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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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개죽이
'09.10.8 12:48 AM세월이군요.
모두 변하게 된 것은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 키가 크고 머리가 크고
난 배불둑이 아줌마가 되었고
내 숙모도 내 동서도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
그게 다 세월 때문이지요.2. blogless
'09.10.8 3:21 PM맞습니다.
그게 다 감기 때문입니다.
다크 서클은 내려오다 못해 목을 감을 지경이고
입가의 주름도 여덟 팔자를 그리지 못해 안달이고
밥을 씹고 있는 건지, 모래를 씹고 있는 건지 모르겠던,
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알 기력도 없던,
어디선가 귀인이 나타나 이 나라를 구제....는 바라지도 않고
내 집 인간들 좀 데려가 배부르게 만들어 보내서
부엌 얼씬 같은 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초현실적인 망상에 빠져드는 건
모두 다 못난 감기 때문입니다.
개죽이 님 점심 맛있게 드셨습니까?
저는 하고 많은 날 중에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감기약에 쩔어 혀가 불능에 빠진 날 비싼 점심 먹었습니다.
아까버 죽겄습니다.
그러게, 세월 너무 미워라 말고 달래가며 살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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