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에는 의욕이 넘쳐서 네이버 키친이니 반찬배달 사이트 등등을 들락거리며
한달치 메뉴도 짜고, 주말마다 별식을 만들러 따로 장보고 그랬어요.
그런데 여섯달 정도 지나서 한계가 왔습니다.
일단 당시에 제가 석사과정 중인 반백수여서 시간이 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두 번, 다른 국과 반찬을 매번 만드는 것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예를 들면 사골국을 만든다면 그냥 물에 뼈 풍덩 투입해서 끓이는게 끝이 아니잖아요.),
결혼 전에도 요리를 가끔 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를 위한 준비가 완벽한 상태였어요
(다진 마늘이니 생강가루, 말린 버섯 등등 모두 엄마가 채워놓으시니
전 그냥 냉장고 열고 꺼내서 조리만 하면 되던 꿈같던 시절).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 냉장고가 스스로 다진 마늘을 리필하지 않더라고요.
처음에 다진 마늘통에 텅 빈걸 보고 너무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물론 마늘을 사고, 손질하고, 다지고, 보관하는 단계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제가 직접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흔히들 하는 말로 ‘현실감’이 없었죠.
‘쌈’을 먹기 위해서는 무려 6~7종류의 양념이 들어간
‘쌈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절 절망에 빠지게 했어요.
친정이 가깝지 않으니 공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경제 뿐 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독립이라고 생각해서 다량의 요리책을 끌어안고
하나하나 격파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조리법이야 슬슬 ‘책으로 배운다’치더라도 메뉴짜기는 정말 고난이었어요.
양가 도움 일절없이 시작한 살림이어서 집 대출금이 상당했고, 외벌이였고,
결혼하고 2개월 만에 임신했고, 전 돈 잡아먹는 대학원생이었고........
그래서 규모있는 식생활이 필요했고 좀 ‘가난한’ 메뉴짜기를 고심했는데
할 줄 아는 요리가 몇 개 없으니 한달 단위로 만드는 메뉴가 아주 어려웠어요.
게다가 한끼로 끝나야하는 국이, 만들다보니 세끼분량으로 늘어난다던가
두끼는 먹겠다.. 생각하고 만든 반찬이 한끼에 없어지기도 하다보니
쪽지에 적어서 하나하나 지워가며 장을 봐도
다른 메뉴에 치여서 냉장고에서 방치되다가 상해서 버리는 식재료들이 속출했어요.
또 요리책과 각종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한달단위 메뉴를 짜는데 비싼 재료는 아웃.
그럴려면 그 자리를 메꿀 다른 메뉴를 찾아야하는데 그것도 시간이 상당히 걸리고
메인 반찬이 고기인데 고깃국을 끓일 수 없고,
생선구이가 오르면 황태국은 피해야하는 법.. 등등을 맞추다보니
장보는 비용도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렇게 몇년을 버벅이다가 정착한 현재의 메뉴짜기 방법을 공개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요리 초보’가 아닌 ‘살림 초보’를 위한 방법이에요.
1. 가지고 있던 요리책 들여다보시면서 머리 싸매지 않고 일단 그냥 마트에 갑니다.
(제가 사는 곳은 둘마트, 홈더하기, 햄버거마트, 둘마트 창고형, 갤갤거려 백화점이 서로 5분 거리에 모여있고
20여분만 나가면 규모가 큰 재래시장인 천안 중앙시장과 온양 전통시장이 있어서
사실 장보는데 최적입니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하나로 마트도 있고, 코스트코도 곧 들어온다고 하고요.
남편은 이게 뭐냐고 엑소더스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때로는 백화점 식품점이 할인마트보다 싼 경우도 종종 있고
마트 한 개 층을 통털어 손님보다 직원이 많은 경우도 꽤 있습니다.)
우아하게 카트 하나 잡으시고 마음이 동하는 식재료를 담으시면 됩니다.
채소, 고기, 생선, 유제품, 양념, 냉동식품, 빵, 과자, 술, 안주류 등등.
저는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포장이 망가져서 반값 정도에 파는 제품을
모아놓은 할인 코너도 잘 이용합니다.
요즘은 채소 봉지 등에 조리법도 잘 나와있어서 읽어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마구 쓸어담아요.
할인 코너, 사랑해요~.
2. 집에 와서 일단 냉장고(냉동실은 안돼요~)와 김치냉장고 빈 자리에 사온 식재료들을 넣고
냉장고 한쪽에 붙여뒀던 집에 남은 식재료 적은 쪽지를 척~ 가져와요.
그러려면 매번 장을 보고 왔을 때마다 식재료들을 적어놓는 수고는 하셔야해요.
영수증을 그대로 붙여서 쓰실 수도 있는데 무 한 개를 한번에 다 쓰는게 아니다보니
지울 시기가 애매해져서 저는 그냥 이면지에 적어놓고 써요.
사실 조분조분 연필로 끄적이는 게 스트레스 해소방법이기도 해서.. -_-;;
감자, 호박, 오징어, 두부, 새송이 버섯, 절단 대구, 절단 가자미, 무, 레몬,
어묵, 떡국떡, 떡볶이 떡, 단호박 1통, 갈치 1팩, 흰다리새우 1팩, 토마토 홀 2캔,
황태포, 달걀, 아몬드.
집에 있는 식재료는 이정도입니다.
더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각종 장류와 양념과 소스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온 식재료들 영수증을 그 옆에 놓고 이제부터 제 두뇌와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오늘 사온 식재료와 남아있는 식재료를 조합해 제가 만들 수 있는 메뉴들을 구상하는 겁니다.
1. 감자와 호박이 있는데 양파와 돼지고기 찌개거리를 사왔으니 고추장 찌개.
2. 감자와 호박이 있는데 양파와 다진 돼지고기와 짜장분말을 사왔으니 짜장밥.
3. 감자와 호박이 있는데 양파와 볶음탕용 닭을 사왔으니 찜닭.
4. 감자와 호박이 있는데 양파와 햄을 사왔으니 햄야채볶음.
.
.
.
.
이런 식이죠. 물론 ‘감자와 호박’이 언제까지 있어주는 않으니까
2번이나 3번의 메뉴에서 멈출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럴 경우 아파트 장에서 그 두 개만 달랑 사오면 다시 3번과 4번 메뉴를 이어가면 되니까
굳이 다른 메뉴 뒤적일 필요는 없더라고요.
또 저는 남편 도시락도 싸주고, 아이 간식도 만들어야하기 때문에 그런 메뉴도 만들어갑니다.
1. 다진 돼지고기를 사왔으니 양파를 다져넣고 고추장 양념해서 고추장돼지고기삼각김밥도시락.
2. 양파를 사왔으니 새우살 굵게다져 새우패티샌드위치 도시락과 새우버거 간식.
3. 햄을 사왔으니 깍뚝썰기하고 데리야끼 양념해서 아이 반찬.
4. 미니 양배추와 소세지를 사왔으니 맥주 안주는 양배추소세지꼬치구이.
.
.
.
.
이렇게요.
종이에 국/반찬/아이반찬/일품요리/간식/안주 정도로 섹션화해서 주욱 적어놔요.
무슨 메뉴를 언제 먹겠다. 하는건 없어요. 그냥 적어놓기만 해요.
그래서 그날그날 먹고싶거나 아이나 남편이 먹고싶어하는 걸 만들어요.
전날 만든 음식이 남으면 굳이 메뉴표를 조정하지 않아도 되니 편해요.
물론 가끔 별식을 만들어먹으려면 장을 또 보기는 하지만
맞벌이 부부에게 차라리 외식을 하면 하지 그런 경우란 거의 없어요.
메뉴를 정해놓으면 사왔던 식재료들을 써내서 용도별로 손질해요.
대파는 설렁탕용, 떡볶이용, 육개장용, 볶음용으로 각각 썰어서 얼리고,
고기도 소분해놓고, 양파도 모두 까놓고,
호박도 당장 먹을 것 아니면 잘게 썰어 볶음용으로 만들어 얼려요.
시간이 없으면 냉장실의 재료만으로 되는 음식을 만들고,
여유가 있으면 냉동실의 고기를 꺼내서 해동하고 양념 만들어 식탁에 올리는거죠.
정 안되면 우유에 시리얼 쏟아서 먹고요.
이렇게 한지 일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이제 메뉴짜기와 장보기에 대한 스트레스가 별로 없어요.
특별한 날에는 요리책보고 색다른 음식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건 두달에 한번...?
하지만 그럴 경우 가족의 원성을 들을 수 있어요. 늘 먹던 것들이라고.
그럴 때 조용히 찜닭 한번 해주거나 난 빵을 잔뜩 구워서
네팔 커리 한번 만들어주면 모두 진압돼요. 남자들이란 단순하더라는..
그럼 이쯤에서 진압요리 중 하나를 공개합니다.
집에 있던 재료 – 레몬, 홀 토마토 캔, 소금, 후추.
사온 재료 – 삼겹살 덩어리, 양파.
제가 아주 옛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근처에서 한달 정도 여름을 보낸 적이 있어요.
그때 현지인에게서 배운 ‘샤슬릭’입니다.
보통 양고기로 만들고, 돼지고기라면 목살을 많이 쓰는데
남편이 삼겹살로 한번 해보자. 해서 이번에 삼겹살 덩어리를 샀어요.
만드는 법은 초간단!!
1. 삼겹살을 크게 깍뚝썰기합니다. 대략 가로세로 4cm 정도.
2.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대충 밑같합니다.
하지만 평소 우리 나라 고기 요리하던 때보다 소금을 훨씬 적게 넣으셔야 해요.
3. 레몬을 껍질과 한쪽의 흰껍질까지 모두 제거한 후 어슷썰어서 고기에 넣습니다.
4. 양파를 슬라이스해서 고기에 넣습니다.
5. 홀 토마토(원래는 생 토마토를 씁니다.
하지만 이 계절에 생 토마토는 너무 비싸서 전 홀 토마토를 써요.
맛 자체에는 차이가 크지 않지만 예민한 분들이라면 뭐여! 케찹틱하잖아! 하실 수도 있어요. )를 넣고 으깹니다.
6. 모두 버물버물해서 최소 6시간 ~ 최대 하루 정도 냉장고에서 숙성시키세요.
7. 그릴이나 오븐에 굽습니다. 프라이팬은 안됩니다.
반드시 기름기가 빠져야하거든요.
양파와 레몬의 양은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토마토는 홀 토마토의 경우 두 덩어리를 넘기시지 마세요.
정말 케찹스러워져요. 생 토마토라면 4개 정도 까지 괜찮습니다.
양파는 고기누린내를 없애고 은은한 단맛을 주고,
레몬은 고기를 연화시키고 샤슬릭 특유의 맛과 향을 만듭니다.
모든 술에 어울리는 샤슬릭 안주 완성!!
덜 익은 것 같다구요? 아닙니다. 촉촉한 육즙이 그대로 남아있어 정말 환상입니다!
소금과 후추만 뺀다면 원시인 다이어트 메뉴로도 좋아요!!.
블라디보스톡에 있을 때 백야.. 까지는 아니지만 12시 넘어서까지 환했어요.
동네 술집에 시계없이 갔다가 어.. 뭐야.. 오늘 해는 왜이리 길어.. 하면서
보드카랑 샤슬릭 줄창 먹고 다음날 아침이........... 뷁!! -_-;;
마지막....
삼겹살로 하지 마세요. 왕 느끼했어요.
역시 먹던 대로 목살로 만들어 먹는 것이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