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토이지만 도서관 간다는 K 때문에 여섯시 반에 일어났다.
주섬주섬 설거지 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H씨 일어났다.
“잘 잤어요.” 인사를 하며 “아침은 뭐 먹을까?” 물으니,
“먹을 것 많은데……. 묵도 있고, 머위도 있고, 상추 씻어 놨고, K는 이거” 하며
쌀로 빚었다는 돈까스 꺼내 놓는다.
“그래도 결혼기념일 앞이잖아! 먹고 싶은 것 없어요?” 다시 물으니
“된장찌개, 다싯물 있고 두부도 있고.” 한다.
설거지 마치고 밥부터 앉히고 뚝배기 꺼내 된장찌개 끓였다.
밥과 찌개 끓는 동안 도토리묵 무치고 고기 없이 쌀로 빚었다는 돈까스 후라이팬에 굽고
냉장고서 반찬을 꺼내 놓았다.



머윗대 무침, 어묵볶음도 있다.
취 장아찌(이건 얻은 건데 아주 잘 먹고 있다)도 꺼내 놓고 생 곰취는 쌈용으로 씻어 내놓았다.
된장찌개 달랑 하나 한 것 같은데 찬이 여섯 가지다. 순식간에 꽤 괜찮은 결혼기념 아침상이 되었다.

화창한 오월의 마지막 토요일 열무김치를 담갔다.
오전인데도 햇빛이 뜨겁다. 결국 뽑은 열무 텃밭에서 다 다듬지 못하고
아파트 등나무 밑으로 가져와 마무리 했다.
아이 얘기, 다듬기와 같은 단순반복 작업이 나이들 수록 좋아진다는 얘기를 하며
등나무 그늘의 바람을 맞았다.
열무 절이는 동안 돌나물 뜯어온 걸로 물김치도 담갔다.
양파와 표고버섯, 다시마 갈아 다진마늘과 고춧가루에 다싯물로 개었다.
찹쌀가루가 없어 풀은 밀가루 풀을 썼다.
부추 한 다발 잘라 넣고 액젓과 소금으로 간을 해 열무김치 양념을 만들었다.
두어 시간 절인 열무 씻어 양념에 버무리고 마무리 하니 오후 3시가 넘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번 열무김치는 결혼기념 선물이 되었다.



지난 주말은 하루는 보람차게 하루는 세상에 다시없을 고역으로 보냈는데
그 중 보람차게 보낸 토요일이었다.
애고~ 아무튼 주말부부에게 주말은 서로 고단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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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자기 삶을 성찰하는 습관에 이어 이번엔 버릇 또는 습관 그 자체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삶에서 습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습관이 중요한지? 습관을 어떻게 보고 대해야 하는 건지?
누군가 “당신은 주로 어느 쪽 손을 쓰나요?” 묻는다면,
아마 나는 “오른손잡이입니다.”고 대답할 거다.
여기서 오른손잡이란 ‘오른쪽 손으로 글을 쓰고 밥을 먹는 것’ 같은 습관들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럼 나는 왜 오른손잡이가 되었을까? 언제부터 오른손잡이가 되었을까?
왼쪽뇌가 오른쪽 뇌보다 어떤 자극에 의해 더 활성화돼서겠지.
그래서 손을 써야 하는 어느 시점부터 오른쪽 손을 더 사용하게 되고
그게 또 왼쪽 뇌를 더 자극하고 그 결과 왼쪽 뇌가 담당하는 영역은 더 활성화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엄마 뱃속에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건 없는 것 같아.
다 태어나서 만들어지는 거지. 사람은 끝없이 변화하며 성장하는데.
이런 변화가 행동이나 정서 반응으로 굳어지는 게 습관이고 버릇인 것 같아.
습관은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같은 무의식적인 행동 뿐 아니라
일정한 외적 내적 자극에 반응하는 정서 반응으로 편견을 만들기도 하고 자기 고집이란 것도 만들어.
과거에 어떤 경험과 자극으로 굳어진 것들이 현재까지 드러나는 게 습관이지 싶어.
그렇게 습관은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의 존재로 드러난다.
어떤 자극이나 생각을 한번 또는 의식적으로 드러낸 걸 습관이라고 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아니면 약간의 의지만 실으면 그냥 드러나는 것들을 습관이라고 하지.
K야
삶에서 습관이 갖는 의미는 과거에 만들어졌지만 현재에 드러난다는 현재성 일 거야.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그만큼 중요한 거겠지.
그럼 우리는 습관을 어떻게 보고 대해야 할까?
습관엔 부정과 긍정성이 다 있는 것 같아.
습관의 긍정성은 말 그대로 ‘습관적으로’ 별다른 노력 없이도 뭔가를 잘 하거나 인식하는 경우일거야.
부정성은 습관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는 경우일거야.
음식에 대한 편견, 자기 경험에 의한 부정적 반응이나 고집 같은 경우지.
우리가 좋은 습관, 나쁜 습관이라고 하는 것들은 잘 살펴보면
‘습관이 끝없이 변하는 우리 삶에 적절히 조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로 판단 할 수 있어.
K야, 습관이 너의 마음과 생각, 반응이 굳어져 드러난 거라면 너의 습관을 너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너의 삶에 적절히 조응하는 습관인지 아닌지 또 어디서 연유한 습관인지 우선 살펴야 한다.
좋은 습관은 나 뿐 아니라 타자의 본성을 침해하거나 세상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는 고집으로 남지 않아.
좋은 습관은 웃음 같은 거야. 빙그레 웃으면 나뿐 아니라 남도 웃게 만드는,
이롭고 선한 반응을 일으키는 웃음 같은 거야.
습관이 되기 전에 너의 행동과 정서 반응을 살펴
좋은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 습관에 갇혀서도 안 돼.
아무리 좋은 습관이라도 습관은 과거에 만들어져 현재에 드러난다는 걸 잊지 마.
과거엔 좋은 습관이었어도 현재의 삶, 변화에 적절히 조응하지 못하면
습관은 곧바로 자신을 가두는 제약이 된다.
이미 낡은, ‘내 것’을 고집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니까 늘 삼가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
삶을 성찰하는 습관만이 끝없이 변화하는 삶에 조응하는 습관인지도 몰라.
습관을 마주할 때, 습관의 상호침투도 잊지 마.
내 습관이 나 아닌 다른 이에게 낯선 마주침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이와의 마주침에 대한 내 반응도 습관이 된다는 걸 잊지 마.
상대의 찡그림에 웃어주든지 같이 찡그리든지, 화를 내든 도망가든 아니면 토닥거리든
결국 내가 만든 습관이 반응으로 나타나, 과거의 내 선택이었다는 걸 잊지 마.
지금 내 선택이 미래의 습관이 되는 거다.
과거에 생성되었지만 현재 드러나기 때문에 습관을 살피려면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
‘현재에 집중하기’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웃음 같은 좋은 습관이라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야.
오늘도 행복한 습관을 만들어 보렴.
* 난데없이 습관에 대해 길게 써서 놀랐겠다. ‘왜 이런데. 잔소리야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
뜬금없이 습관에 대해 긴 편지를 쓰게 된 건 누가 나한테 묻더라.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냐?”고.
그래서 생각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다 습관이 제일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네게 얘기해주고 싶어졌어.
그런데 좀 웃긴 건 습관에 대해 길게 생각하고 젤 무섭다고 생각 해 놓고 보니
습관 말고도 무서운 게 많아지더라. 생각하면 할수록. 그래서 꼬박 일주일 머리가 너무 아팠어.
이번 편지는 길어서 손 편지로는 못 보내겠다. 출력해서 보낼게. 그래도 이쁘게 봐주라!! 딸! 잘 지내.
인간의 기본욕구중 하나인 먹는 것, ‘습관으로서 음식’에 대한 것도 얘기 해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이건 네가 생각해서 얘기해주거나 편지 주면 고맙겠는데. 따님! 한 말씀 해주실 수 있는지요?
ㅋㅋ 생각하기엔 너무 바쁘신 고3이시라 안 되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