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썬글라스를 쓰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어요. ㅋㅋ
눈이 아파서;
호주 가기 전에 눈을 수술하고 갔거든요.
눈이 초고도근시라 반 봉사 수준이었는데(울 오마니 표현)
수술하고 신세계를 영접했죠. 세상에, 아침에, 누워서 시계가 보이다니!
아마 렌즈용품, 안경(눈 나쁜 분들은 아실 듯.
집에서 렌즈 빼고 폐인 모드일 때 쓰고 있죠. ㅋㅋ), 렌즈,
바리바리 싸 가지고 갔다면 고생을 더 했을 것 같아요.
공기 맑고 컴퓨터 할 일도 거의 없는 호주에서
제 눈은 잘 쉬었는데... 요즘은 그 동안 못한 걸 보상받겠다는 듯
집중적으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매일매일 눈이 시리고 아파요.
그래도 할 게 너무 많아서 안 볼 수가 없네요.
썬글라스를 찾아내 떡하니 쓰고 앉아 있으니
몰골은 좀 우습지만 눈은 약간 편안한 듯도 합니다. ㅋㅋㅋ
+ + +
네, 저는 퍼스로 갔었어요.
캔버라, 시드니, 브리즈번, 멜번... 케언즈, 골드코스트 등이
모두들 동부에 몰려 있는 반면
퍼스는 서부에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도시죠. 호주 사람들도 퍼스 갈 때는
외국에 가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해요.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동부에서 만난 호주 사람들 중에서,
한 명도 퍼스 가 본 사람이 없었어요.
(...라고 쓰고 보니 저도 제주도 한 번 못 가 본 서울 촌것이군요. ㅋㅋ)
*
빛의 도시 퍼스.
그 이름에 반했었어요.
아, 찬란한 도시겠구나, 환하고 아름다운 곳인가 보다, 생각했죠.
그러나 가서 보니 그것은...

땡볕!!!...의 도시,
지글지글 굽는 무서운 햇!!!...‘빛의 도시’라는 뜻이더구만요=_=;;
호주의 도시들 중에서 일 년 중 햇빛 일조량이 가장 많다던가
뭐, 맑은 날이 가장 많다던가... 했을 때는
그냥 막연하게 그런가 보다, 하고한 날 비 오는 것보단 좋겠지, 했는데
가서 보니 이게 장난이 아니더라, 이런 말씀이었던 거죠.
지난 번 게시물에서, 그 곳의 더위가 얼마나 장난이 아닌가에 대해
살짝 썼는데
똑같은 얘기 백 번을 반복해도
아마 다 전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요. ㅋㅋ
우리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는 ‘바싹 마른 건조함과 뜨거움’이
거기에 있더군요.
근데요, 에어컨은 어느 건물에서나 팡팡 틀어요.
에너지 절약, 냉방병 조심, 그런 거 없어요. 실내 온도 보면 18도, 17도.
18도 실내에 있다가 40도 바깥에 딱 나가면...
온도 차와 갑자기 몰려드는 열기와 건조함에 피부가... ... 아팠어요;
아뉘 22도 차이라니;;;;

퍼스 시티(시내를 이렇게 불러요. 시티 나갔다 올게! 이렇게.)에서...
쇼핑 센터나 백화점, 사무실이 있는 쪽 말고
클럽이나 카페 같은 게 몰려 있는, 좀 ‘노는 쪽’인 ‘노스 브릿지’에요.
햇살이 느껴지시나요?
이 건조함과 뜨거움이 좋은 점도 있긴 했어요.
빨래를 아침에 해서 널면,
저녁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요, 점심에 걷으면 됩니다. ㅋㅋㅋㅋ
아주그냥 만져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강렬한 햇볕에 살균소독까지 다 된 듯한 바삭바삭함으로
퍼!펙!트! 하게 말라 있어요.
이불 빨래 해서 널어도 두 시간이면 다 마른다는
이런 환상적인 얘기 들어 보셨습니까? 나라 전체가 아주
거대한 빨래 건조기 같아요.
(여름이니까, 여기서 말하는 건 두꺼운 이불은 아니에요 ㅋㅋ)
저는 가끔,
한국의 애기 있는 집들이 여기다 기저귀 빨아서 널면
끝내주겠다... 한국 주부들이 이 햇살 보면 무지 좋아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고추장 단지 열어 놓기도 좋고 하얗게 빨래해서 널기도 좋은 그런;
그래서 그런지, 호주에서는 빨래 건조기를 별로 안 쓰는 것 같았어요.
적어도 제가 본 한도 내에서는요.
*
참, 하늘은 참 파랗죠.
제가 느낀 호주의 장점 중 하나가
차가 많이 다니는 큰 도시도, 공기가 깨끗하고 하늘이 맑다는 것이었어요.
맑으니 아름답고요.
내가 한국 돌아가면, 다른 건 다 기억 안 나도
저 하늘은 기억이 나겠구나... 했어요.
*
그리하여 저는
피부에 닿으면 바작바작 피부를 구워 대는 느낌의 햇볕을 피하고자

............-.-;; 양산을 썼어요. ㅋㅋㅋㅋ
사진은 뒷마당에 내놓은 제 양산이에요.
제가 퍼스 있는 동안 비도 거의 안 왔는데
뭘 말리겠다고 저렇게 펼쳐 놨을까요. 기억이 안 나네요.
우산 겸 양산으로 쓰겠다고 가져갔던 건데
시내에 양산 쓴 여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눈치를 좀 보다가
결국은 못 견디고 쓰기 시작했죠.
겁나 많이 쳐다봅니다............ 저거 쓰고 걸어가면 ㅋㅋㅋㅋ
하지만 전 굴하지 않아요. 흥, 난 타죽고 싶지 않아, 속으로 이러면서
용감씩씩꿋꿋하게 양산을 쓰고 퍼스 거리를 활보했어요.
뭐 누구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어때요; ㅋㅋㅋㅋ
한국인인 듯한 애들이 쳐다보면
사실은 부러운 거지!(역시 속으로) 그러면서 룰루랄라 다녔어요.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면
길을 다니는 데 그리 많은 뻔뻔함이 필요하지 않아요 ㅋㅋㅋㅋ)
참. 호주 도시는, 거리에 있는 상가들이 처마를 길게 낸 곳이 많아서
비가 와도 잘만 하면 우산 안 펴고 걸어다닐 수 있을 만큼
거리에 뚜껑처럼 지붕이 쭉 이어져 있는 모습이 많은데...
그런 데서는 햇볕도 요령껏 피할 수 있구요.
양산을 접어도 되죠^^

이런 곳요^^
(이건 정육점 간판이군요.
간판이 예쁘장한 것이, 공해가 아닌 느낌이 들어 찍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평소엔 꼭 필요했답니다. 특히 집 근처에는 그늘이 거의 없어서 말이죠.
집에서부터 트레인 역까지 걸어서 한 7분 걸렸는데
양산을 쓰고 걸어가면, 머리 부근은 가려지지만 다리는 안 가려져요.
반바지를 입고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걸어요;
양산 그늘로 못 가리는 다리가 너무 뜨거운 거에요ㅠㅠ
(이 때는, 빨래 건조기라는 생각이 지워지고
이놈의 나라는 그저 전체가 오븐이구나, 싶어지면서
제가 오븐 속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한 마리 통닭이 된 기분이었어요)
역에 도착해서 벤치에 앉아 다리를 보면
그 7분 사이에 벌겋게 데어서(이거슨 진정 화상인 거죠)
확확 달아오르고, 그랬어요.
* *
쉐어 하우스 얘기.
남이 렌트해 놓은 집에 방 하나만 빌려 들어가는 걸
쉐어라고 불러요. 주방, 욕실 같은 건 같이 쓰고요.
워홀 간 애들이 대부분 이렇게 살아요.
홈스테이보다 싸고, 자유롭고,
직접 밥을 해 먹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입에 맞는 걸 해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많이들 이렇게 해요.
대신 홈스테이는
현지 가정의 생활을 곁에서 볼 수 있고,
영어를 집에서도 계속 쓸 수 있고
한 끼 정도는 밥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 때문에
어학연수 온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더군요.

(제가 좀 노르끄레한 사진 색감을 좋아하다 보니
음식 사진 찍어 둔 것도 이런 게 많네요; ㅎㅎ)
쉐어 메이트들과 같이 해 먹은 스파게티에요.
쉐어 들어간 집은, 방이 네 개,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이었어요.
화장실 하나는 쉐어 주인 방 안에 있었구요.
보통은 다섯 명이 살았다고 했어요.
두 명이 같이 쓰는 ‘더블룸’이 그 중 하나 있었거든요.
제가 들어갔을 땐... 렌트 해서 방을 세놓는 한국인이 많아져서
방이 잘 안 나가던 때였어요. 그래서 다섯이 살아 본 적이 없네요.
더블룸이 잘 안 나가서, 단기 쉐어(1, 2주, 아니면 한 달,
이런 식으로... 별로 오래 안 있고 잠깐잠깐 있다 가는 걸
그렇게 불렀어요)로 있다 가는 사람들이 몇,
그 방을 거쳐 갔어요.
음... 그러니까... 웬만하면, 쉐어 주인들은 단기 쉐어를 선호하지 않지만
(한 번 와서 오래 있는 사람이 좋죠.
또 광고 내고 사람 구하고 하는 게 번거롭기도 하고
식구처럼 정 들이고 살고 싶은데 스쳐 지나가면 그게 안 되고...)
하도 들어올 사람이 없으니 단기 쉐어라도 받게 된다는 거죠.

네 명이 같이 먹은 걸 보니
집에 있는 쉐어 식구들이 다같이 먹었던 것 같아요.
가운데 반찬은 김치입니다...............................참 없어 보이는 식탁이네요 ㅋㅋ

누가 요리했더라?; ㅋㅋ
다 직접 한 건 아니었고, 토마토 소스 사다가
쇠고기 볶고 면 삶아서 섞은 다음에 말린 오레가노 뿌린 거에요.
*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태어나 살아온 환경이 다 다른, 친구도 아니었던 생판 남들이
한 집에 식구처럼 모여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생활 습관도 다 다르고.
누구는 청소를 생전 가야 하나도 안 하고
누구는 설거지를 꼭 미뤘다가 하는데 그걸 못 참고 해 버리는 사람은
자기만 늘 한다는 것에 불만이 그득 쌓여 가고
누구는, 같이 음식 해 먹을 땐 제일 많이, 빨리 먹으면서
돈은 최대한 안 내려고 하고......... 뭐 그런;;;;;
누군가는 참을 수 있는 습관이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못 견딜 습관이고
그런 거요. ㅋㅋㅋㅋ
그래도, 그래도요,
쉐어 주인의 방침에 따라 이 집은 여자들만 받는 집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그래도 우리집 식구들이었던 사람들은
다 웬만큼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쉐어생들에 대한 별별 기상천외한 얘길 많이 들었지만
(식구처럼 한 집에 살지만, 자기 살림은 칼같이 따로 써요.
치약, 비누, 고추장, 쌀, 뭐든지.
근데, 남의 양념을 자기 병에 몰래 조금씩 덜어 두고 쓴다든지
그 외의 살림살이를, 자기는 하나도 돈 주고 안 사고
당연한 듯 남의 걸 쓴다든지...
뭐 이런...;;; 말하기도 치사하고 참자니 병 난다는 얘기들이 많았죠.
노트북 같은 걸 훔쳐 갔다 들켰다,
방 빼는 날 다른 방을 다 털어서 도망갔다- 그런 얘기도 들었구요.)
저 집에 사는 동안, 그런 일은 없었거든요.
그러니 우리집은 양호한 게 아니었나,
지금 생각해 봅니다.
서로, 사이도 무난히 좋은 편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스쳐 가도.
이렇게 같이 음식도 해 먹고.

밀가루!
0.99센트인가, 하여튼 1달러 안 되는 가격이었어요.
콜스라는 대형 마트의 홈브랜드인데(PB 상품 같은 거요)
홈브랜드는 일단 무조건 쌉니다.
이걸로 뭘 했게요?

요래요래 반죽을 해서
만두를 해 먹었어요.
어느 날, 누군가가 만두가 먹고 싶어! 했는데
거기에 다들 삘;을 받은 거죠.
한인 마트에 냉동 만두를 팔기는 하는데 조미료 맛이 많이 나고 맛이 별로에요.
고기가 듬뿍 든 촉촉한 만두를 먹고 싶었던 우리는...
작당을 하여 장을 보고 본격 준비에 돌입했죠.
반죽이 아주 딴딴하게 잘 된 게 보이시나요~^^
반죽은 식구 중 동생 담당이었는데
자기가 발로 밟아 반죽해서 이렇게 쫀쫀하게 만들었다며
매우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ㅋㅋ
아, 물론 비닐에 싸서 밟은 거에요 ㅋㅋㅋㅋ
(만두피를 팔았던 것 같기도 한데... 우린 돈을 아껴야 되는 거죠. ㅋㅋ
무조건 싼 거!
먹기 위한 노력이 좀더 필요하더라도.)

부추도 다듬고 파도 까고.
(잉; 근데 파가 들어갔었나-_-;...)

두부도 사다 무거운 걸로 눌러 놓고.
한인 마트에 두부 팔고요(사진 속의 것은 생긴 것을 보아하니
한인 마트에서 공수한 듯 하네요),
그냥 호주 마트에도 두부를 팔아요. 토푸-_-라고.
토푸에 관한 저의 풀리지 않던 궁금증.
도대체! 무엇을 넣었기에 너의 유통기한은
한 달을 넘어 두 달에도 육박하는가???
비닐 포장 위에 찍힌 날짜를 보고 놀라 넘어갔죠.
뭔진 몰라도 괴앵장히 몸에 안 좋은...
내가 죽어도 몸을 썩지도 못하게 만들-_-...
그런 방부제를 들이부은 게 아닐까 의심을 하면서도-_ㅡ+
한인 마트 없는 곳에 살 땐 그냥그냥 사다 먹었어요.
아쉬우니까;;

한인 마트는 보물창고이자 천국이에요.ㅠㅠ

당면도 삶고.

고기 양념도 하고.
호주엔 정말로 쇠고기가 흔하고............................
흔해 빠졌고;
대신 돼지고기가 그리 다양하지 않아요. 몇 종류 되지도 않고
갖춰 놓는 양도 그다지;
통삼겹처럼 생긴 걸 파는데, 가끔 사러 가 보면 다 팔려서 없을 때가 많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구하기도 힘든 돼지고기 대신 흔하디 흔한 쇠고기 간 것을 사다가
(산다 한들 가는 것도 일이죠. 돼지고기는 간 걸 안 팔더라고요.
우리가 못 찾은 건가;)
쇠고기 만두를 해 먹기로 한 거죠.

제법 그럴싸하게 만두속 비슷한 것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일동, 급흥분.

만두 속재료 완성!
그냥 떠먹어도 맛있겠다고
우리가 만들고 우리끼리 오도방정을 떨며 침이 마르게 감탄을 한 뒤
만두 빚기 돌입.

만두피는 제 담당이었어요.
고급스럽게 밀대 같은 건 안 키웁니다.
집에 굴러다니는 먹고 난 맥주병 출동.
제일 싼 맥주라고 워홀 애들이 제일 많이 먹었던 엑스트라 드라이로군요. ㅋㅋ

어릴 때 분식집 주방장 아저씨가 하는 걸 봤었는데
그거 따라해 봤어요.
두툼하게 밀어서 길게 똑똑 썬 다음에
대충 비슷한 크기로 깍둑썰기를 해서 하나씩 잡고 미는 거죠.
반죽 양을 일정하게 나눌 수 있으니
손으로 떼서 하는 것보다 일정한 크기의 만두피를 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고 저는 생각했어요^^

아놔 아저씨는 얇게 얇게 잘 밀던데-_-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더군요.
밀대가 없어서일 거에요. 그럼요.
그래도 맨 위의 것은 좀 그럴싸하지 않나요? ㅋㅋㅋㅋ
맨 아래 것은 반죽이 말랐었다는 티를 너무 내고 있네요.

만두 모양이
식욕을 떨어뜨릴 만큼 너무 한심스럽게 나와서(앞의 놈들)
그냥 둥글게 말아 붙이기로 합의를 봤어요.(뒤의 놈들)
근데

만든 손이 여럿이라 그런지

모양이 몹시 개성있게 제각각 나왔어요-.-
어쨌거나 이젠 먹을 일만 남았으니
찌면 되는 겁니다.
근데 찜기 같은 건 없어요.
찜판도 없었어요.
그래서... 지난 번의 그 라이스 쿠커 내솥에 물을 붓고
만두를 차곡차곡 담은 그릇을, 내솥 안에 얌전히 넣었어요.
뚜껑을 닫고 취사 버튼을 눌렀죠.
대충 중탕 비슷하게 물이 끓으면서 스팀이 오르면
만두가 익을 것이다... 하는 기대였죠.

쨔잔~
익었어요! 아아 저 반투명한 만두피의 자태...
정녕 이것이 우리가 만든 만두란 말입니까.
재료부터 다 준비해서 만두란 걸 만들기는
너나 할 것 없이 난생 처음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무진장 매우 기뻐했답니다.
야 우리는 못 할 게 없구나.

.................................죄다 터졌어요.
숟가락 출동.
도저히 집어먹을 수가 없이 다 들러붙어 터져 버리는 만두ㅠㅠ
다들 숟가락 하나씩 들고 퍼 먹었죠.
퍼 먹으면 어떠냐, 맛만 있으면 되지!
.
.
.
.
.
.
맛
없었어요. ㅠ_ㅜ 엉엉;
그게...
부드럽고 촉촉한 고기 만두를 생각하며 열심히 만들었는데
그게요,
쇠고기를 썼더니 영판 뻣뻣한 것이
고기 가루가 입 안에서 굴러다니더라고요.
맛도 향도, 구수한 돼지고기의 그것이 아니었어요.
비계가 없어서 그런가... ... .
쇠고기로 만두 만들면 원래 다 그런 건지
아니면 저희가 뭘 잘못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못 먹을 맛은 아니었는데, 돼지고기 만두에 익숙한 입으로 먹기엔
좀... 뭔가... 많이 이상한... 낯선 향과 질감의
그런 만두가 되어 버렸어요.
그래도 며칠에 걸쳐
꿋꿋이 다 쪄서 먹었답니다.
그리고
통삼겹을 사다가 손으로 다지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쇠고기로 만두를 만들지 않겠다
는 결심을 했지요.
밀가루는 많이 남고
부추도 한두 줌 남았었어요.
역시나 1달러에도 벌벌 떨던 시절,
버릴 수 없죠.

소금 조금 넣고 반죽 만들어서
부추전 부쳐 나눠 먹었어요. 딱 한 장 나왔어요^^
이건 또 어찌나 맛있던지.
*
그렇게 지냈던 단기 쉐어 메이트 한 명이
떠났어요. 일자리를 찾으러.
아는 사람들 몇이랑 팀을 꾸려서 농장으로 떠난다고 했죠.

짐 꾸려서 떠나기 직전에 찍은 사진이에요.
(제 열린 방문이 보이네요. ㅋ)
이렇게, 누군가 떠나고, 또 누군가 오고...
그런 것이 워홀 메이커들의 생활이었죠.
짧게 지냈던 사람이건 오래 있던 사람이건
누군가와 헤어지는 건 항상 아쉬웠어요.

그래서, 차가 데리러 온다는 집 앞 도로까지
짐 들고 배웅 나갔어요.
안녕안녕, 잘 가.
누군가 떠날 때는, 뒤에 남는 사람들은 항상 그런 말들을 했어요.
꼭 좋은 일자리 찾고~ 나도 가게 자리 좀 맡아 놔!
그만큼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었거든요.
*

다같이 먹었던 케익과 와인.
한국처럼 다양하고 예쁜 빵과 파이, 케익들을 파는 제과점은 잘 없구요
(시드니에선 봤는데 퍼스에선 하나도 못 봤어요.
아마 없는 것 같아요.),
담백한 빵이 주를 이루는 ‘빵 위주’의 빵집이 있었고
또 마트에서 웬만한 빵은 다 팔고, 그랬어요.
마트에는 플라스틱 용기에 포장된 단 케익들도 많아요.
딸기 케익도 있고 초코 케익, 커피향 케익, 호두 케익, 치즈 케익...
동그랗거나 네모지고 데코레이션은 참 별로인
달디단 케익들이 항상 있었죠. ㅋㅋ
이 케익은 이름이... 머드 어쩌고 하는 초코 케익이었던 것 같아요.

위에 얹은 저것이... 아이싱이라고 해야겠죠? 하여튼 저것이
정말정말 답니다. 설탕이 와삭와삭 씹혀요.
저는 어릴 때부터 단 걸 좋아해서
한창 클 중학교 땐가, 찻잔 받침에 설탕을 몰래 덜어서
혀로 할짝대고 핥아먹다가(단 걸 별로 안 주시니까)
엄마한테 뒤통수를 썌리~ 맞은 적도 있었더랬죠. ㅋㅋ
근데, 크면서 아무리 좀 덜 좋아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저 케익은 인간적으로, 한 조각 이상은 못 먹겠더군요.

받으시오~ 한 잔 받으시오오~
저희가 무슨 생각으로 단 케익과 단 와인을 같이 먹었을까요?
...몰라요-_-;
근데 맛있게 잘 먹었던 걸로 기억해요.

이 와인은 우리 돈으로 한 6천 원 정도 하는
아주 값싼 화이트 와인이었는데
와인 코너의 ‘모스카토’ 모아 놓은 쪽에 가면 있었어요.
거기서 아마, 거의 가장 싼 와인이었을 걸요. ㅋㅋ
저는 와인 맛을 잘 모른답니다.
(사실은 다른 술맛도 잘 모르고, 맥주 맛만 잘 알아요 ㅋㅋ )
그냥 대충 다 떫거나 시큼한 것 같아요-_-...;
이거나 저거나 다 비슷한 것 같고.
그러니 고급 술을 줘 봐야 술만 아깝죠 ㅋㅋ
이 와인은, 포도 주스처럼 상큼하고 좀더 달달한 맛에
다들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마셨어요.
이 때 맛을 들여서, 나중에 저 혼자 살 때도
모스카토 와인을 사다 놓고 혼자 한 병 다 마시고 그랬죠. 하하하하;
이 때는 이 와인을 처음 먹어 본 때였는데
제가 산 건 아니었고... 뒤에 흐릿하게 찍힌 저 언니가 샀던 거였어요.
(제대로 안 찍혀서 그냥 안 가리고 올렸어요;)
워킹 온 애들은 다들 돈을 아끼느라 정신없고
그래서 누구에게 베푸는 데에도 참 인색하기가 쉬운데
언니는, 뭐든지 사면 항상 아낌없이 나눴죠.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단기 쉐어로 있었던 언니였는데...
일자리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냥 여행이나 실컷 하겠다고
동부에서 여기저기 다니다가 퍼스로 온 거였어요.
퍼스에서도 몇 군데 가 보고, 곧 떠났죠.
*
(언니 얘기 쪼끔 더 하고 싶지만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언니가 떠난 뒤에, 새로 쉐어생을 들여야 하는 이 집에
더블룸을 혼자 쓰겠다는 남학생이 등장했어요.
금남의 집에 남자라니.
광고도 ‘여자들만 사는 집입니다’ 라고 냈던 만큼
단호히 거절했어야 했겠지만...
앞서도 썼듯 쉐어 과잉 공급으로; 쉐어생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어서
주인 애는 고민에 빠졌어요.
이... 좀... 어딘가 개성이 몹시 강해 보이는 남학생은
찾아와서는
지나치게 정중하여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말투를 쓰면서,
집에서는 술도 안 마시고
당연히 담배는 나가서 피울 것이며
친구들도 안 데리고 오고
더블룸을 혼자 쓰는 대신 두 명 몫의 방값을 지불하겠다,
고 하는 거에요.
오, 두 명 방값을 혼자?
그럼 욕실이나 주방 쓰는 것도 한 사람이 줄어서 우린 좋은데
비용 면에서도 나쁠 게 없고... ... .
독특하다기보다는 좀... 어딘가 모르게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사람을 선입견 가지고 대하면 안 될 일이고...;
지금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집을 빨리 결정하고 싶다고 조르는데, 좀 안됐기도 하고...
그리하야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 회의(?)를 거친 끝에
이 남학생에게 금남의 집 문을, 열어 주기로................... 했지요. 녜.
* * *
근데요,
그 이후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
.
.
지금부터 아래에는, 사진은 없고 글만 있을 거에요.
그 당시에 제가 제 미니홈피에 썼던 일기인데요 ㅋㅋ
현장감을 위해 고대로 한 번 옮겨 봅니당.
이 남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일기 앞부분에서 보실 수 있어요. ㅋㅋ
시간도 없고, 사진 없는 긴 글 읽는 걸 안 좋아하시는 분은...;
그냥 패스하셔도 될 것이어요.
원래는 집 내부를 그린 그림을 사진 첨부하려고 했는데
아직 그림을 안 그리기도 했고-.-;;;
이미 이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아, 오늘은 요기서 마무리 하려고요^^
게시물 작성하는 거,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요.
꾸준히 게시물 올리시는 키톡의 모든 분들, 존경합니다-.-;;
아이고 어깨야;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또 뵈어요 ^^/
* * * 자, 그럼 일기 나갑니다.
일기인데 왜 반말이냐면... 가끔 그렇게 쓰곤 해요. 편해서^^
(엇, 아니다. 일기는 원래 반말이죠-_-; '일기인데 왜 대화체냐면...'으로 고칠게요 ㅋㅋㅋ )* * *
오늘 낮이었어.
난 집에 있었지. 이력서를 내러 나갈 예정이었는데, 먼저 점심을 먹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면서, 나가기에 적당한 시각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집에는 나와 T씨가 있었어. 나머지 두 명은 각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고. T씨는 약 2주쯤 전에 입주한, 이 집의 유일한 남자야. 이 집의 렌트 역사상 첫 남학생이지. 더블룸에 혼자 두 명 몫의 돈을 다 내고 들어오겠다고 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인데 여기 얽힌 얘기는 또 책 한 권이지만 일단 패스.
T씨는 담배를 피워. 그런데 이 집에 들어올 때 약속한 것 중 하나가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것이었지. 그래서 그것 때문에 자주 왔다갔다 해. 나가서 피우고 들어오느라고 말이야. 때로는 문을 덜컹거리며 여닫기도 하지만, 무시로 왔다갔다 하는 게 가끔은 미안한지 문을 살짝 여닫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지.
어쨌든, 난 영화를 보고 있었어.
그리고 내 방은 현관문 바로 옆에 있어. 사람이 오가는 소리가 다 들리는 거지.
영화를 보고 있는데, 시끌벅적한 영어 대화 사이로 현관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들렸어. 가만 들어 보니 발소리도 좀 들리는 것 같고. 소리를 죽여 살그머니 걷는 소리였어.
나는 생각했지.
T씨가 늦게 일어났구나.
이 사람은 일어나면, 맨 처음 커피를 한 잔 타서 밖으로 나가거든.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하루를 시작하는 거야.
그런데 발소리가 집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계속 조금씩 들렸어.
나는 또 생각했지.
T씨가 또 뭘 잊어버렸구나.
이 사람, 나보다 한참 어린데 정신이 정말 없거든. 이 정도면 병이다 싶을 정도로 건망증이 심해. 커피 하나만 예를 들어도- 커피를, 마시다 잊어버려. 그래서 마시다 만 커피가 든 잔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그럼 나는 그 컵들을 수거해다 설거지를 하지. -.-;
그런 잔들 중에는 인스턴트 커피(맥심 커피믹스야.)를 부어만 놓고 물을 안 부은 잔도 있어. -_- 이렇게 해 놓고 어딜 갔는지 몇 시간씩 사람이 안 보이는 거야. 그럼 또 그 잔을 씻어서 치워 버리지. 그래도 나중에 들어와서, 찾지도 않아; 아마 자기가 그래 놓았다는 걸 까맣게 잊은 게지.
커피 봉지를 뜯다가 만 채로(다 뜯은 것도 아니고) 탁자 위에 놓아 두고 사람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어.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잊어버리는 거야.
처음엔 이해가 안 갔는데, 친구가 가방을 자기 차에 놓고 갔다고, 그걸 갖다 주러 나간다면서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아 두고 나가는 걸 보고- 친구 만나러 나간다면서 담뱃갑과 라이터와 핸드폰을 얌전히 식탁에 놓고 나갔다가 30분쯤 지난 뒤에 헐레벌떡 들어오는 걸 보고, 담배 피우러 나가면서 번번이 열쇠를 잊어서(그런데 바람에 문이 닫혀 버려서. 닫히면 잠기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 밖에서 문을 콩콩콩콩 30분 정도 두드리는 걸 보고(아니 왜 터프하게 쾅쾅 두드리며 열어 달라고 말을 못해!)- 아, 저 사람은 원래 저렇구나, 생각하게 됐어.
그러니 커피 마시러 나가면서 서너 번 왔다갔다 하는 건 일도 아닌 거야. 뭘 놓고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기본이 서너 번인 거지.
이번엔 또 뭘 잊었나, 생각하며 난 영화를 보고 있었어. 발소리를 유난히 죽이는 걸 듣고, 대낮에 저 정도로 조심할 건 뭐 있나 생각도 했지.
영화에서는 시끄러운 대화 장면이 계속되고 있었어. 하도 정신없이 대화가 지나가서, 나는 일시정지를 했다 앞으로 돌려서 다시 보고, 하며 열심히 집중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번엔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이상한 건, 이 소리는 마치 내 방문이 덜컹거리는 것 같이 들렸다는 거지. 마치 누가 문을 잡고 살짝 흔들어 보는 것처럼. 그리고, 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어.
그래서, 난,
뒤를 돌아 보았지.
컴퓨터는 책상에 놓여 있고, 책상은 창문을 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창문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방문은, 책상을 향해 그렇게 앉았을 때의 왼쪽 벽- 저기 좀 뒤쪽에 있거든.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떤 남자가 내 방문을 살짝 열고 엿보고 있는 얼굴이었어.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여기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후다닥! 여러 가지 생각이 지나갔어.
T씨인가? T씨가 왜 내 방문을 열어 보고 있지? 나한테 뭐 물어볼 게 있나?(난 이 시점에서, 보던 영화를 일시정지 시켰어. 물어볼 게 있는 것이면 대답을 하려고.) 아니 그럼 노크를 했을 텐데? 잠깐만, 저건 T씨가 아니잖아? T씨라면 노크를 했을 거고 저 사람은 T씨보다 키가 작아.
그럼,
저건,
누구야???
얼어붙은 것 같은 순간이 지났는데, 그게 몇 초인지도 모르겠고 그 사람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그게 낯선 사람이라는 판단이 되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지.
방문을 열고 나갔어. 무섭기도 했지만 여기서 쫓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거든. 거실에 나가서 소리를 버럭 질렀지.
누구야?!
하고.
그런데 거실엔 아무도 없었어. 현관문으로 도망간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며(그랬다면 문 소리가 크게 났을 거야) 현관을 돌아봤는데... 거실 쪽 베란다 문이 눈에 띄더군. 그 문으로 나가면 뒷마당이고, 뒷마당에는 차고로 통하는 나무문이 있어. 베란다 문은... 방충망 문이 하나, 유리문이 하나, 이렇게 이중인데 보통은 유리문을 열고 방충망 문을 닫아 두거든. 그런데 그 문이 활짝 열려 있더군.
아, 저기로 도망갔구나 생각하며 나가 봤어.
사방은 조용했어- 뒷마당은 옆집과, 또 뒤쪽 다른 단지의 집과 면해 있는데 모두 남자 키를 넘기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튼튼한 담은 아니야. 슬레이트 담장 정도랄까.) 만약 도망간 사람이 담을 넘었다면 뛰어내리는 소리가 났을 거야.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심지어 달려가는 소리조차도.
그럼 어디로 간 거지?
하다가, 차고 쪽으로 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뒷마당에서 고개만 조금 더 내밀면 차고 쪽이 보이는데, 차고로 나가는 나무문 바로 직전에 창고처럼 쓰이는 공간이 있어. 근데, 거기에 숨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 들고- 갑자기, 무섭더군.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어.
그래서 살짝 가 봤지. 그런데 그 나무문이, 활짝 열려 있었어.
평소에 그 문은 닫혀 있고, 자물쇠가 걸려 있어. 잠겨 있는 건 아니고 '걸려' 있다는 얘기야. 원래는 잠가야 하는데 열쇠가 없어서, 만져 보기 전에는 안 잠겼는지 모르게, 잠근 모양으로 걸어 둔 거야. 그런데 자물쇠를 걸어 둔 그 고리는 상당히 빡빡해서 내가 가끔 차고 쪽으로 쓰레기 버리러 나갈 때도 좀 힘들게 열곤 해. 즉, 그 때 즉석에서 열기엔 시간이 좀 걸렸을 거라는 거지.
T씨!
난 집 안에다 대고 크게 불렀어. 그랬더니 잠에서 막 깬 듯한 목소리가 대답을 하더군.
나와 보세요!
부르고는... 차고 쪽으로 나가 봤어. 그랬더니 쓰레기통 위에, 문에 걸려 있던 그 자물쇠가 얌전히 놓여 있더군.
내가 정리한 생각으론 이래.
그 낯선 사람은... 현관문으로 들어왔어. 현관문도, 나무문과 방충망 문, 이중인데 평소엔 환기도 시킬 겸 나무문은 열고 방충망만 닫아 두거든. 그 문을 살그머니 여는 소리를 들었으니, 거기로 들어온 게 맞을 거야.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집 안에서 좀 왔다갔다 했어. 그 발소리를 내가 들었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봤는데 아마 이건 도주로를 확보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 그 때 베란다 문도 열어 두고 차고 문도 열어 둔 것 같다는 거야. 차고의 그 얌전히 놓여 있는 자물쇠- 그건 급히 열고 도망간 모습이 결코 아니야. 급히 연다고 잘 열리는 문도 아니고.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놈은, 다시 집 안으로 돌아왔어. 근데 말이야, 내 방 말고도 이 집에는 방이 세 개나 더 있다구. 두 사람은 나가고 없었고, T씨는 자고 있었기 때문에 집 안은 적막했어. 귀를 기울여 봤다면 아마도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내 방이 아닌 다른 방들에서는 충분히 감지를 했을 거야.
뭔가를 훔쳐 가려면 그 방들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살짝 열어 보고, 물건들을 들고 달아나기엔 그런 방들이 좋지, 않았을까?
내 방 밖에는 벗어 둔 슬리퍼가 방을 향해 있고(사람이 안에 있다는 얘기지), 무엇보다도 영화 소리가 나고 있었잖아. 멈췄다 돌렸다 해 가며 틀었으니- 아마도 사람 없이 영화가 혼자 돌아간다는 느낌은 안 들었을 거야.
왜, 그런 내 방문을 열었을까? 사람이 있는 게 뻔한데? 물건을 털어 간다면 이런 방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지 않나? 보아하니 영화에 빠져 있는 것 같으니, 가만히 내버려 두고 다른 방만 몰래 털어 가는 것이- 즉, 내 방은 건드리지도 않는 것이 도둑에게는 더 좋지 않나?
그럼 그 놈은 도둑이 아니란 얘긴가?
물건 털어 가는 게 목적이 아니었을 거란 얘기야?
...무서웠어.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무서워.
다른 주택들은 아예 현관문이 길을 면해 있어. 거기에 비하면 비밀번호를 누르게 되어 있는 철문이 있는 이 단지는, 그나마 뭔가 좀더 안전한 느낌이 들기는 해.
하지만... 실은 그게 더 무서운 거야.
그런 열린 집들을 두고 이 단지를 굳이 택해 들어올 도둑이 있을까? 남자들이라면 조금만 애쓰면 간단히 넘을 수 있는 철문이 뭐 그리 대단한 안전장치라는 게 아니라, 내가 도둑이라면 굳이 월담을 해야 하는 집을 택하진 않을 거라는 거야. 널리고 깔린 게 그냥 문만 열면 들어갈 수 있는 집들인데 뭐하러 번거롭게 이런 단지를 고르겠어? 혹시 들켜서 달아나야 할 때에도 그 철문이 한 번 더 앞을 가로막을 텐데.
그렇다면... 그 도둑(인지 뭔지)은 이 단지 내의 사람이라는 걸까?
어쩌면 여자끼리만 사는 집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수 있겠군.
(- 덧붙임 : 상황이 바뀌었지만, 그 전까진 내내 그랬으니까요;)
어디로 가야 도주로가 있는지도 알고 있었을 수 있고.
없어진 물건은 하나도 없어. 방마다 DVD 플레이어나 노트북 컴퓨터, 카메라 등 값나가는 물건들이 있었는데, 건드린 흔적 하나 없었어.
어쩌면 그 놈은, 그냥, 이런 집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해 놓고 사는지가 궁금했던 걸까? 그래서 몰래 들어와 이리저리 구경을 했던 걸까?
...그랬을 수도.
아니, 차라리 그랬기를.
같이 사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을 때, 우린 모여서 얘길 했지.
더워도 문은 꼭꼭 잠그고 지내기로 했어. 서로 피를 나눈 가족들이 아니어서,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도 일일이 고개 내밀어 인사하진 않는 면이 있는데...(일일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문이라도 잘 잠그고 단속해야지.
(하지만, 문을 활짝활짝 열고 바람 잘 통하게 해 놓고 지내기를 좋아하는 나는, 생각만 해도 답답해. ㅠ_ㅠ)
또 난... 열두 가구가 있는 이 단지 내에, 내가 본 것 같은 동양인(머리카락 색과 피부색이, 동양인이었어.)이 사는지 확인하고 싶었어. D는(이 집을 렌트한 애야) 옆집의 중국인들이 이사를 가서 이제 동양인은 우리 외에 한 집밖에 없다고 했는데... 난, 키며, 체격 같은 걸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그리고 겸사겸사 다른 사람들에게도 문단속 잘 하라고 얘기도 해 줄 겸, 단지 내를 한 집씩 다 두드리며 다녀 볼까 의논을 했어.
D랑 둘이 나가서는 그런 얘기를 하며 다른 집을 기웃거리는데, 어떤 흑인 아저씨가 내다보더군. 그 아저씨에게 얘기를 하고, 그 얘기소리를 듣고(이 단지는 아주 조용해서, 누가 근처에서 말을 하면 그게 상당히 크게 들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서, 또 얘기를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연락해서 돕기로 하고 핸드폰 번호를 몇 개 교환했어.
일단은 없어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경찰을 부를 수는 없었고... 그냥 그렇게 우리끼리 의논을 하고, 말았지.
단지 끝까지 가 보니(별로 크진 않은데 우리가 문 쪽에 살아서, 안쪽까지 가 볼 일이 없었어) 몰랐던 문이 거기에 또 하나 있더군. 공원으로 통하게 되어 있는 문이고, 그건 비밀번호 따위는 없는 아주 허술한 문이었어. 누구나 열 수 있는.
어쩌면 그리로 누군가가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럼 단지 내 거주자는 아닐 수도 있겠군.
이 점에 D는 무척 안심했지만.
난, 글쎄.
달려가는 소리 같은 건 안 났다니까. 순식간에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니까. 난, 눈은 나쁘지만, 귀는 상당히 밝아. 잘못 기억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어- 오늘 낮, 그 때, 사방은 정말 조용했어.
누군가 작정하고 현관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왔었고, 쉽게 달아났어. 그리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어.
이 단지를 잘 아는 사람이거나... 자기 집으로 달아나 숨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밖에 난 생각이 안 되는데.
어쨌건.
오늘의 뜻하지 않은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어.
일기를 쓰다 보니 낮에 한 번도 안 해 봤던 쪽으로 생각이 미쳤는데... 그건 너무 무서워.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어쨌거나 나는 이력서를 내러 나갔다 왔고, 오는 길에 볼 일도 다 보고 필요한 것도 사 가지고 왔어. 이런 나를 보고 D는, 언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밖에 잘 나가게 되더냐고, 무섭지 않더냐고 했지만- 글쎄 뭐, 할 일은 해야 하는 거니까.
...라고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스스로 좀 씩씩한가 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
어둠이 내리니까 새삼 다시 두려워졌어. -.-; 다들 들어오며 잠갔던 현관문은, 방금 전에는 왜 다시 열려 있었던 걸까? 으.
생각도 않고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주친 그 얼굴- 문을 아주 조금 열고, 살짝 엿보고 있던 그 얼굴, 그 때의 그 섬뜩한 느낌을, 잊을 수 있기를 바라.
잊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걸 썼는데 -쓰면서 털어 버리려고- 어째 쓰다 보니 더 무섭군. -.-;;
생각하지 않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도 같네.
* * *
그런데,
인생은 시트콤,
내가 말했었잖아. 인생은 시트콤이라고.
어디에나 웃음 포인트는 있어. ㅋ
영화를 보고 있었을 때, 그러니까
문 소리를 듣고 내가 뒤를 휙, 돌아보았을 때
난 얼굴에 마스크팩을 하고 있었어.
알지? 하얀 마스크팩. 눈, 코, 입만 구멍이 뚫려 있고
얼굴 전체를 덮는 팩.
덮고 있다가 문득 거울을 보게 되면,
자기 얼굴인데도 때때로 헉, 놀라게 만드는 그 팩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그 자식도, 퍽이나...
놀랐을 것이야................................... 놀랐겄지................ 암.
-.-
난 그렇게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