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집에 오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콩알을 골라야 합니다.
조카네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콩알 고르기에 진력이 난 조카가 일을 시키려면 잘 먹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슬쩍 딴지를 걸었습니다.
"글쎄 뭐가 좋을까?" 하는 내 말에 조카가 콩자루 옆의 찹쌀 자루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약식 해 먹을까?"
약식이라니! 제가 펄쩍 뛰었습니다.
"그 어려운 것을 어떻게 만들어?"
그러다가 문득 82cook에서 본, 컵케잌같이 예쁜 약식이 떠올랐지요.
그래서 겁도 없이! 들이댔습니다.
꽃게님 식 약식을 시도하고 싶었는데, 밤이 없어 우리집에서 요즘 제일 흔한 콩을 넣기로 했습니다.
대추와 잣은 설날과 대보름 때 남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레시피에는 찹쌀을 3시간 정도 불리라 했는데, 마음이 급해 30분도 채 못 불린 채 압력솥에 앉혔습니다.
압력추가 움직이고 약식 냄새가 나는데, 아~ 감동적이었습니다.
제 생전 처음으로, 그것도 제가 지은 찹쌀로 약식을 만들다니!
드디어 압렵밥솥 개봉!
콩을 고르던 조카와 조카손녀도 우루루 렌지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럴 듯해 보였습니다.
뜨거움도 잊은 채 얼른 맛을 보니, 맛도 괜찮은 듯 싶었습니다.
"성공이다, 성공!"
조카손녀가 박수를 쳤습니다.
성형 단계로 들어갔습니다.
마땅한 틀이 없어 과수원 올라갈 때 가져가는 스텐 컵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가운데가 허전하여 삶은 계란을 살짝 놓았습니다.
"대추하고 잣 빼면 다 이모네서 나온 거네!"
"그럼!"
공연히 어깨가 으쓱여졌습니다.

약식이 익는 사이에 조카손녀가 좋아하는 김치부침개도 만들었습니다.
마침 조카가 사온 오징어와 굴이 남아있어 그것도 넣었습니다.
생전 처음 약식을 만든 날인데, 축하의 막걸리 한 잔이 빠질 수가 없었지요.

혼자서도 대견한 마음으로 약식에 박힌 메주콩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흑대문집 할아버지와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해 그댁 밭에서 콩 농사를 지은 거였습니다. 할아버지 건강이 급작스레 나빠지셨거든요.
마침 그날 아침에 집안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병원에 가신다는 할머니를 뵙기도 했지요.
제일 예쁘게 나온 약식 몇 개를 골라 흑대문집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는 방에 누워계셨고, 할머니는 부엌에 누워계셨습니다.
고통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얼굴로, 할머니는 짠지가 맛나다며 가져다 먹으라고 여러 번 그러셨습니다.
매듭 굵은 할머니 손을 잡는데, 가슴이 싸아해졌습니다.
지지난해 늦가을, 멍들이 요란하게 짖어 밖을 내다보니 낮은 대문 앞에 흑대문집 할머니께서 김치통을 들고 계셨습니다.
짠지가 맛나게 되었다며 맛이나 보라시는데, 힘이 드셨는지 얼굴이 벌개지셨더군요.
이곳 분들은 김치를 짠지라고 하십니다.
불편한 다리로 무거운 통을 들고 오셨다고 생각하니 그저 송구한 마음에 고맙다는 인사도 얼른 못 드리고
연신 아이구! 아이구! 만을 연발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해 겨울, 가운데 지팡이 짚으신 분이 흑대문집 할머니입니다.
흑대문집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디 덜 아프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