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규모있게 지은 콩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골똘하게 궁리하던 때였지요.
그렇게 들어오게 된 이곳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워싱턴 디시와 토론토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벼락치기로 이루어졌지요.
워싱턴 디시에 사회에서 만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살아온 친구인데, 몸과 마음이 너무나 지쳐있는 것 같아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남편하고 술 한 잔 하는데,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을 그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토론토에 있는 여학교 때 친구도 생각났고.
그렇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비행기삯이 얼마인데, 또 농사일도 시작되는데, 시간도 그렇고...
마음 속에 갈등이 일었지요.
다시 그렇지만! 내 일생에서 단 며칠, 그리고 비행기삯이 무슨 대수랴!
지친 친구에게 다만 며칠이라도 따끈한 밥을 지어주자!
그렇게 해서 그 다음날 제일 싸고 빠른 비행기표 알아보고 이틀 후에 날라갔습니다.
싼 티켓으로 가는 턱에 베이징과 뉴욕을 거쳐야 했던 그 먼 길에 제가 달랑 들고 간 게 뭐였나 하믄요,
제가 기른 콩으로 만든 청국장과 떠나던 날 아침에 김칫독에서 꺼낸 신김치 몇 쪽이었습니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그 신김치 송송 썰어 김치부침개 부쳐서 둘이 술 한 잔 진하게 했습니다.
아침이면 생청국장 갈아 먹여 친구 출근시키고, 저녁에는 청국장 팔팔 끓여 함께 먹었습니다.
멸치 몇 마리만 퐁당 넣은, 시원하고 칼칼한 김치찜도 만들어 먹었습니다.
정말 맛나다며 친구는 끼니마다 밥을 한 공기 반이나 비웠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친 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었지요.

<이곳에서 처음 보고 배운 김치찜이 지난 겨울 우리집 기본 메뉴가 되었습니다.>
토론토의 친구는 여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니 30년도 넘었지만, 만나는 순간, 그 세월은 온데도 간데도 없어지더군요.
2박3일동안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했는지, 둘 다 목이 다 쉬었답니다.
그 친구는, 그러니까, 늘상 붙어다니던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중3때 한 번 같은 반이었던 같고 그 후 1년에 몇 번 만났는데, 그 만남이 늘 진했었지요.
왜, 그런 친구 있잖습니까....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그 동안의 이야기 나누느라 골몰하여, 어쩌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그 일조차 해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친구는 내게 꼼짝말 것을 명하고는 제가 만든 것을 먹여주었습니다.
향기로운 커피, 인도에서 배웠다는 짜이, 크로아상....
떠나던 날 아침에 내놓은 과일 샐러드는 눈으로도 한참을 즐겼습니다.

신기합니다.
30년만에 친구가 온다 하니, 그 친구의 캐나다 친구가 그러더랍니다.
"그렇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면 어색해서 어떡해?"
그렇지만, 우리는 만나는 순간 곧장 손을 잡고 옛날로 걸어들어갔습니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일들도 우린 담담하게 이야기했답니다.
친구는 참으로 멋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넓고 깊고 부드럽고 여유있고....
지금도 친구와 함께 들었던 나이아가라폭포의 물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눔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다지게 되구요.
집을 떠날 때는 내 일생에서 다만 며칠을 친구들을 위해 온전히 쓰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돌아와서 생각하니 친구들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에서 귀한 며칠을 나를 위해 떼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집 떠나던 전날, 우리집 막내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났습니다.
남편은 생각나지 않는데, 꼬물거리던 그 녀석들은 자주 눈에 밟혔댔지요.
돌아오던 날, 그 녀석들이 눈을 반짝 떴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