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하나가 K가 세상에 나올 때 분만실 앞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다.
그해 연말 H씨는 산달이라 처가에 가 있고 나는 그 날 심한 감기 몸살로 조퇴하고 끙끙 앓고 있었다.
늦은 밤 난데없이 전화가 울렸다. “병원에 간다.”는 전갈에 택시타고 병원에 도착하니
H씨는 이미 분만실로 들어가 있고 그 밤을 분만실 앞 쪽 의자에 장모님과 앉아
이제나 저제나 분만실 문이 열릴 때 마다 이름이 불리길 기다렸었다.
신기하게도 오한을 동반하던 감기 몸살은 마음에서 사라지니 몸에서도 사라지더라.
그땐 요즘과 달리 산모와 가족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육중한 분만실 앞 의자와 인터폰만이 산모와 아이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소통공간이었다.
그렇게 20여 시간을 분만실 앞을 지킨 다음 날 저녁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며 “내일 다시 유도분만 해보자.”는 의사의 말과 함께 H씨는 입원실로 옮겨졌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에 나는 그저 H씨 손 잡아주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악~ 소리 나도록 내손을 부여잡는 H씨 손아귀 힘만큼 이를 앙다물고 같이 힘주는 것 말고
아무 할 게 없던 그날 새벽 1시쯤 예고 없이 어머니께서 오셨다.
“내일 다시 유도분만 할 거라” 하니 “그럼 내가 있을 테니 집에 들어가서 좀 자고 아침에 오라”는 말씀에
별 생각 없이 집에 들어가 잠을 잤고 K는 그 새벽에 세상에 나왔다.
돌아보면 참 철없었다.
아무리 H씨가 동의했다 해도 가란다고 간 나는 참 철없고 어리석고 준비 안 된 애비였다.
분만실에서 나오는 K를 처음 안아보지 못해 아쉽고 H씨에겐 지금도 앞으로도 미안할 일이다.
이후 술자리 같은데서 아이 낳는 얘기가 나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 나올 때까지 산모 옆을 지켜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세상 나오며
엄마 좀 힘들게 하고 타이밍 못 맞춰 애비 낯을 붉히게 했던 녀석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 지났다.
방학이라 온 식구 늘어지게 늦잠자고 아침 겸 점심으로 차린 생일상.


냉이와 부추, 상추 샐러드 또는 무침
냉이는 살짝 데처 소금에 따로 무치고 간장과 들기름, 발사믹식초로 드레싱했다

지난 가을 고구마 캐며 말려 두었던 고구마줄기로 '고구마줄기들깨탕'

50cm가 채 안되던 녀석이 어느새 ‘주민등록증 하라’고 연락오고
이 추운 겨울 레깅스에 핫팬츠 달랑 입고 코트로 살짝 가리는 ‘하의 실종 패션’으로 외출을 하신다.
“옷 좀 입으라.”는 지청구엔 “뭐 어때, 안 추워” 하며
거울 앞에 서서 앞태보고 뒤태보고 요리조리 비춰보는 걸로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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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지났지만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이제 고 3이라 한 열 달쯤 고생하겠다.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지’ 하는 맘이 살짝 들기도 하는데 잘 해낼 거라 아빤 믿어. 우리 딸 힘내!
그리고 네가 지금 행복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렴.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엄마, 아빤 항상 네 편이 되어줄게.
결과를 가지고 우리한테 미안해 할 필요 없다는 말이야.
너의 삶이니 굳이 미안해해야 한다면 너에게 미안할 일일뿐이지.
잊지 마! 지금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쫌 소박한 생일상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