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꼴까닥 삼십고개로 넘어가는 그 이른 봄날...
이제와 생각하니 중신아비에 의해 엄청스레 뻥튀기로 부풀어진 그의 '조건'도
그때 등떠밀려 나가서 깔고 앉은 바늘방석을
꽃방석으로 만들어주진 못했다.
안경을 쓰고, 말이 없고, 단답형으로만 일관된 대답...
의례껏 하는 말이었던듯 저녁을 같이 먹자할때 바쁘다는 말을 뒤로하고 일어서는 나에게
그는 불쑥... 노점에서 산 작은 선물하나를 내밀었다.
별볼일 없이 콧대만 높았던 나에게
선물을 내밀던 그의 손이 유난히 각인되었다.
일주일후 불쑥 전화한통 없던 그가 직장으로 날 찾아왔다.
좀더 어렸을땐 애프터가 없는 남자를 놓고 씩씩거리며 짜증내던 나였지만
그러려니 무던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나이가 되어버린 그때는
잊혀져가던 그 남자 얼굴도 얼른 기억이 안나서
한참을 얼굴붉히고 서있게 만들고서야
내게 얼마전 '선'이라는것을 성립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라는걸 알았다.
허세라고는 돈주고 사려고 해도 찾을수 없는 그 남자는
늘 분식집 김밥을 먹이고
길다방 커피만 먹이고
자가용 11호만 태웠었다.
그래서 우리는 김밥만 보면 웃는다.
내가 너무 싸게 팔려왔다고 자책하면서...^^;;
그렇게 시작해서 일년을 사귀고 결혼이란걸 하게 되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난 그때까지도 못해본 일이 너무 많았고
못가본 곳도 너무 많아서
결혼을 너무 빨리 하는거라고 툴툴거렸다.
웃으면 하얀 이가 너무도 싱그럽게 보이던 그 남자는
이제 내 옆에서 자고
내가 한 밥을 먹고
나와 같이 사내아이 둘을 낳고
나와 같이 날마다 집을 짓고 허물며 인생을 설계해가는
'남편'이 되었다.
서서히 인생의 짐이 무거워져감을 모른척하지 못하고
어느날 가족을 두고 먼 도시로 직장을 옮겨갔다.
전혀 해보지 않은 일들을 새로이 배워
앞으로 해야할 숙제로 여기며 지금도 묵묵히 일을 한다.
외로움이 목구멍까지 차 오르면
유난히 길어지는 남편의 문자 릴레이...
외로워서인지 맛있는 음식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할땐
난 속으로 운다.
그렇게 2-3주를 지내다 집으로 돌아오면
잔뜩 가지가 벌어진 튼실한 사과나무처럼
양팔에 개구쟁이 하나씩 매달고서 아빠와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환영인사가 벌어진다.
그날 비로소 나의 식탁은 만찬이 된다.

(작년이 결혼 9주년이었어요.
남편과 아이들과 여행을 떠났지요.
숙소에서 남편이 만든 투박한 카나페와 포도주...
집에서 가져간 작은 초와 케잌에서 뽑은 초가 어우러져
예쁜 빛을 밝혔지요.
아빠를 매일 보지 못하게 된 후
아이들은 부쩍 자란것같아요.
아빠는 일터로 떠나기전에
잠든 아이들에게 뽀뽀를 하고
편지를 남겨놓아요.
아침이 되면
시무룩한 아침상이 맥없이 하루를 열지만
오후가 되면
다시 에너지 만땅 개구장이들로 돌아오지요.
짧은 글이나마 편지를 써서
아빠오시는날 지갑에 넣어줄줄도 알구요.
언젠가는 지금 이 시간도 추억이 되겠지요.
갑자기 비가 내리니 마음이 스산해져서
옛날사진을 뒤적이게 되네요.
가족과 떨어져 계시는 수많은 기러기아빠들...
당신은 참으로 소중한 분이예요!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