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너무 늦게 자 느즈막히 일어나니 그래도 새해 첫날인데, 떡국이라도 끓여야겠다 싶어
급히 마트에 들러 만두피, 다진 돼지고기, 숙주를 사왔어요.
그래도 새해 첫 식사인데, 시판 만두로 떡국을 끓일 순 없잖아요. ^^V

김치는 속을 털어내고 총총 다졌어요. 두부는 양파망에 넣어 물기를 꼭 짜주고(녹차 두부라
초록빛이 나요. 녹차 한잔 마시면 될걸 두부에 녹차가 들어가면 얼마나 들어간다고...
그냥 하나 사면 하나 더준다고 해서 집어 왔지요.), 돼지고기는 미리 후추, 소금, 참기름 넣어
밑간해 두고, 숙주는 살짝 데쳐주고, 당면은 푹 삶아줬어요.

아직 만두피를 직접 만들 엄두는 안나는데, 시판 왕만두피는 만두피가 좀 두꺼워 식감이 별로
좋지 않아요. 크기도 성에 차지 않구요. 그래서 시판 왕만두피를 일일히 밀대로 밀어서 좀 더
얇고 크게 만들어줬어요. 만두피를 밀다 보니 다음에는 직접 반죽해서 만두피를 만들 용기가
나네요. 다음에 대왕만두 기대하세요~

일일히 만두피를 밀며 만두를 빚다 보니 1시가 넘어가요. 일단 여기까지만 빚고 나머지는 남은
만두피와 함께 냉장고에 넣어놨어요.
만두 빚다 보니 또 엄마 생각이 나네요. 만두나 송편을 이쁘게 빚어야 이쁜 딸 낳는다고 하셔서
명절이면 엄마 옆에서 조물딱 조물딱 이쁘게 빚으려고 기를 쓰던 기억도 나구요.
어렸을 때, 우리집엔 명절 때마다 선물이 산처럼 쌓였었어요. 아빠가 평생을 몸 담으셨던 군대는
뇌물성 선물이 난무하는 곳이었죠. 제가 아빠와 엄마를 존경한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속에서도
아빠와 엄마 만큼은 정말 깨끗하셨다는 거.
뇌물성 선물 한번 없이도 아빤 승승장구 대령까지 진급하셨고, 결국 별을 달지 못하고 군복을
벗으셨을 때도 전 아빠의 청렴결백한 예편이 자랑스러웠어요.

만두피가 얇아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요. 사람이든 만두든 속이 투명해야 좋아요. ^^
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방학 때 아빠 부대에 내려갔는데, 엄마가 신문지에 쌓인 만원짜리 뭉치를
내보이시며 풀어보라고 하셨어요. 당시 금액으로는 꽤 컸던 300만원.
- 이게 뭔지 아니? 이건 이걸 싸고 있는 신문지 만큼이나 가치가 없는 거야.
그리고, 그 300만원은 건네었던 그 사람에게 다시 돌아갔죠. (엄마, 그런데 300만원은 커녕 3원의
가치도 없는 신문지도 있어요. 그런 신문이 방송을 먹으려고 한대요. 세상 참 요지경이지요.)

일단 찜기에 쪄줬어요. 남편이 배고프다고 성화라 일단 만두 세개로 입을 막아주구요.
엄마가 모든 선물을 다 돌려보낸 건 아니었어요. 아빠 대대장 하실 때 근처에 사시는 중대장
내외가 갈비세트를 명절 선물로 보내 왔거든요. 그 갈비세트를 풀며 아빠 중대장 하실 때
우리들에게 돼지고기도 맘껏 못 먹였다며, 자기 자식 못 먹이는 갈비 세트 선물하는 심정이
어떻겠냐며 눈물 글썽이던 엄마 모습을 생생히 기억해요. 그 집도 저희 집처럼 세남매였거든요.
그리고, 주말에 중대장 내외분과 어린 아이들까지 초대해서 갈비 파티를 했던 것두요...
갈비에 살이 그대로 붙어 있는 걸 일일히 칼집을 내어 손질하던 엄마... 지금의 저보다 더 어린
나이였는데, 엄만 어떻게 갈비 손질하는 법까지 아셨을까요?

속이 꽉찬 만두. 만두피가 얇아서 야들 야들 해요. 밀대로 한번 더 밀었는데도 만두피가 찢어지지
않는 거 보면 이 시판 만두피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오*기 감사합니다. ^^

만두 찌면서 떡국 끓이기 시작. 냉동실에 얼려둔 사골 육수 하나 꺼내서 그대로 끓여요.
만두 육수용으로는 고기를 넣지 않고 따로 준비해뒀거든요. 고명을 따로 얹을 거라.

육수가 끓는 동안 나머지 만두도 살짝 쪄줬어요. 냉동했다가 다시 한번 더 끓여줄 거기 때문에
5분 정도만 살짝.

그리고, 그대로 냉동실로 직행. 이렇게 살짝 쪄주면 만두를 얼려뒀다가 바로 끓는 물에 넣어도
만두가 터지지 않아요. 그냥 얼리기도 하는데, 이번 만두는 만두피가 얇아서 찐 후에 얼려줬어요.

끓은 사골 육수에 찬물에 불려둔 떡국 떡을 넣어 떡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면 계란을 풀어줘요.
그런 엄마를 보고 자란 터라 결혼 후 명절에 남편 앞으로 선물이 꽤 많이 왔는데, 대부분 받지
않았어요.
연기자며, 매니저며 선물 받기 시작하면 나중에 캐스팅 할때 골치 아프거든요. 제대로 한 캐스팅도
선물 주고 따냈다고, 자신의 인맥 관리 능력을 떠벌리는 매니저도 있어요.

불려둔 당면과 달걀 푼 걸 넣어주고, 거품을 걷어낸 후 마지막으로 대파를 썰어 넣어요.
만두는 미리 쪄뒀다가 다 끓인 후에 퐁당 퐁당 넣어줬구요.

고명으로 김가루 뿌려주고, 저번에 찢어서 얼려둔 사태도 고명으로 얹어줬어요.
한번은 한창 클린 MBC 일환으로 전사적으로 선물 받기 거부 운동을 하던 때에 집으로 자연산
송이가 배달 되었어요. 제가 없는 사이에 경비실에 맡겨져 있었는데, 보낸 사람은 이름만 대면
아는 아역 출신 연기자였답니다.
당시 컴백하고 이렇다 할 활동이 없을 때, 남편이 단막극에 비교적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
시켰거든요. 그 작품은 수술 후 남편의 첫 복귀작이기도 했어요. 남편 건강을 생각해 자연산
송이를 선물로 보낸 마음은 고맙지만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선물을 받을 수는 없었어요.
행여 민망해 하거나 불쾌해 할까봐 고민하다가 그녀의 주소를 물색해 장문의 편지를 써서 동봉해
돌려 보냈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남편의 회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서요.

이리하여 단촐한 새해 첫 식사 완성. 반찬은 달랑 김치랑 지난 번에 해서 냉동실에 얼려둔
빈대떡 꺼내서 지져준 게 다예요. 떡국만 있음 되죠 뭐. ^^
그런데, 1주일 쯤 후 생각지도 못한 우편물이 온 거예요. 그녀가 자필로 쓴 세장의 편지.
저의 마음 씀씀이와 내조에 감동 했다며, 저를 통해 자신을 뒤돌아 봤다는 감사의 편지였어요.
진심은 고가의 선물도 넘어 통하는 법이구나 싶었죠.
저와 동갑인 그녀가 TV에 나올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져요.

자, 떡국 한입. 떡국을 먹어야 나이도 먹고, 철도 들어요.

만두도 한 입 드세요.... ^^

그런데, 지난 주에는 얼마전 남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던 모 연기자가 등심을 갖다 줬어요.
손수 운전해서 집으로 갖고 와서 안 받을 수가 없었다네요.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너무 맛깔나게 잘해줘서 오히려 제가 선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등심 먹고 힘내서 파업 투쟁 이겨내라는 마음인 것 같아 새해 첫날 저녁에 먹기로 했어요.
상태를 보아가며 구우려고 오븐에 넣지 않고, 프라이팬에 궜어요. 육질이 좋아 스테이크 소스를
따로 만들지 않고, 소금간만 하고, 풍미를 더하기 위해 양파도 같이 볶았어요.

가니쉬는 아스파라거스 베이컨 말이구이, 당근은 손가락 굵기로 모양을 다듬어 주고,
감자도 같이 오븐에 넣어 구웠어요. 전 오븐 구이 할때 시간을 안보구요 그냥 가끔씩 문열어
상태 봐가면서 구워요. 감자가 잘 안 익어서 중간에 당근과 아스파라거스는 먼저 빼주고,
감자 표면이 노릇노릇 해질때까지 220도에서 더 익했어요.

정말 푸짐한 저녁이었어요. 절대 먹는 거 남기지 않는 남편이 미처 다 먹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등심이랍니다.

피클과 김치를 곁들인 등심 스테이크.
오늘도 역시 남편은 여의도 집회에 참석 하러 갔답니다. 동상 증세로 시퍼렇게 부어오른 발로
다시 칼바람 속으로 나가는 남편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나마 오늘은 날이 풀려 다행이에요.
파업이 장기화 되면 직원분들 건강도 많이 나빠질텐데 걱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