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길담의 프랑스어문 교실 (어문 교실이란 제목은 언어만이 아니라 문화로 접근하는 방식을 표현하고
싶은 길담 서원지기님의 깊은 의도가 포함된 제목이었답니다.) 첫 교시 동사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교재를 들고 온 아우라님, 그런데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말은 인용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표지에 실린 티치아노의 그림에 눈길이 계속 가더군요.
한 번 이렇게 관심이 가면 어디선가 그것을 풀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법, 그래서 오늘 밤 집에 들어와서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무심코 보던 그림인데 우리를 향한 그림속의 인물들 순서배치가 평소 보던 것과는 거꾸로네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이 가면 왼쪽에 젊음이 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달리 배치했을까?
아우라님의 지적을 받고서야 아하 그렇군 하고 반응을 하게 되었는데 오늘 그림을 자세히 보니
흐릿하지만 검정색으로 글씨가 잔뜩 씌여져 있기도 하군요.
티치아노란 이름도 모른채로 만난 첫 작품입니다.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런던에서 내셔널 갤러리에 들렀었지요.
어린 딸과 함께 한 곳, 그 아이는 그림앞으로 자꾸 다가서는 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꼬 지금 생각하면
고문이 따로 없었을 것 같네요.
저도 그 이전에는 미술관에 다닌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이상하게 몇 점의 그림이 제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 겁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그림이었고 일부러 엽서도 사서 지금도 갖고 있지요.
그렇게 만난 티치아노, 색의 베네치아 선의 피렌체라고 말할 때의 바로 그 베네치아는 티치아노를 빼고는
성립이 되지 않는 표현이 아닐까요?
추기경이나 교황의 옷에서 볼 수 있는 색의 향연이라면 역시 라파엘로도 빼놓을 수 없지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갔을 때 자석으로 된 라파엘로 그림을 하나 구해서 냉장고에 붙여 놓고
매일 보고 있는 것도 역시 추기경의 옷 색깔인데요 신앙이 없는 제가 물론 신심으로 그 그림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고 색이 나를 부른다고 느끼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것, 그러니 제겐 아직도 그림은 색과 빛, 그리고 어둠을
맛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네요.
그가 그린 수없이 많은 성화와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저를 끌어당기는
그림들은 바로 이런 작품들이지요. 사람을 드러내주는 그런 그림들
파울루스 3세를 그린 티치아노, 레오 10세를 그린 라파엘로, 그림속의 추기경이나 교황을 모아서
한 자리에 전시하는 것은 어떨까?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은 추기경 복의 색을 처리하는 화가들의
차이를 보는 것에 관심이 가기 때문일까요?
사실 처음에 티치아노를 볼 때는 강사인 아우라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보내는 선물로
고를 작정이었지만 역시 삼천포로 빠져서 이야기는 멋대로 뻗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그것 나름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멋대로 정하고 계속 그림을 보면서
처음 어린 왕자 책을 불어로 펼쳤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생각납니다.
도대체 읽을 수 있는 단어가 거의 없어서 절망감을 느끼면서 그대로 덮고 이대로는 어렵겠다 싶어서
영어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읽었지요.
그 다음에 대조해가면서 짐작으로 간신히 한 번 읽고 조르바님에게 번역하는 것을 도움받으면서 한 번
그리고 혼자서 다시 한 번, 동사 변화 배우고 다시 한 번, 드디어 오늘 1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순간
느꼈던 감동이라니!!
하얀 것은 종이, 검은 것은 글씨라는 수준에서 시작하여 거기까지 갈 때, 함께 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어린 왕자말고 다른 한 텍스트는 철학책에서의 중요 구문을 인용한 것이라 아직은 손도 대지 못하고
어디서 무엇을 찾아야 할 지 모르는 상태지만 한 번 경험한 일이라서 당황하는 마음이 덜하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도 상상속의 두려움이 더 큰 것이 아닐까? 일단 해보는 것, 그리고 모르면
모르는대로 앞으로 나가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날 , 한 학기 강좌가 끝나는 날까지
함께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마음 든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