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를 보고 나서 그 다음 찾아간 곳은 다이도쿠지, 그러나 기타노 텐만구를 보기로 했기 때문에
다이도쿠지에서 쓸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이도쿠지를 처음 의식하게 된 것은 리큐에게 물어라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은 덕분이지요. 이 절과 관련된 인물이 여럿 있는데 앞에서 말한 잇큐상이 말년에 이 곳의 주지로 있었다고
하고요, 센 리큐라고 전국시대 무장들의 다도 스승이었던 인물이 이 곳과 인연이 깊었지요.그가 이 절의 보수를 위한
불사에 참여한 공로로 절에서 그의 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의 조각상이 위에 놓여 있는 바람에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이 인사를 하고 지나는 꼴이 되어 그를 경원시했던 히데요시의 부하 이시다 미쯔나리가
그것을 문제삼았던 때문이지요. 결국 센 리큐는 히데요시와의 불화로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더군요.
가을에 도쿄에 갔을 때 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것을 들었지만 이 절에 와서 포스터를 보리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앗,이런 것이 차이인가 하고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마침 절 입구에서 사무를 보고 계시는 아저씨랑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요. 이 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달라고 했더니 일본의 유명인들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고 하면서 잇큐상,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센 리큐, 그리고 호소카와 가라샤 (호소타와 가문으로 시집간
미츠히데의 딸)가 다 이 절과 연관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림으로도 볼 만한 것이 많고 정원도 좋다고 말을 하면서도
센 리큐와 관련된 곳은 닫혀 있어서 볼 수 없다고 하네요. 보자면 한이 없고 그렇다고 젼혀 못 보고 갈 수도 없어서
마음 가는대로 이 곳 저 곳 둘러보았습니다.
이 절은 조선통신사들이 왔을 때 묵었던 절이라는 인연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 곳에 들렀던
인물이 바로 김성일과 황윤길, 두 사람이 당파가 갈려서인지 서로 바라본 실상이 달라서 조선에 돌아와 보고한
내용이 달랐던 것이 일본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문이 우세한 사회와 무가 우세한
사회의 차이란 상당했을 것이지만 차이에 주목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오래 전 선조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지만 혼자서 그 상황을 그려보게 되네요.
여기도 역시 가레산스이식 정원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이상하게 이 곳은 들어가는 곳마다 입장료가 있는
별스런 방식을 채택하고 있네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돌아나오는 길, 정갈한 노렌이 돋보이는 집이 있어서 찍어보았습니다.
길거리에 다이토쿠지를 설명하는 간판에 한글이 있는 사연은 바로 조선통신사 일행에 관한 글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밤이면 교토에서의 마지막, 이렇게 많은 아쉬움이 있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8박 9일 여행을 다 교토,나라
아스카, 이런 식으로 일정을 잡았더라면 몇 번이나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랬더라면 함께 한 아이들에게
고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언젠가 혼자서 이 길을 다시 오면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을 조금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다시 보고 싶네요.
그 때는 한, 중,일 세 나라 불교의 수용, 건축, 조각, 불교회화등에 대한 공부를 더 해서 밝아진 눈으로 찾아오면
금상첨화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