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제자들에게 보내는 글
그 해는 4월까지 너무 추웠습니다.
내복에 코트까지 껴입었지만
허허벌판에 학교 건물만
달랑 서 있는
그 곳까지 가려면
몸이 떨렸습니다.
서울 변두리
남자 고등학교
국어강사로 교직에
첫발을 내딛은 나.
5월까지 내내 긴장했고
열띤 수업의 여파로
목까지 쉰채, 몸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면
맨 끝에 있는 아이들까지
나를 주목하고 바라봐야
신이 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는 수업,
하나라도 남는 것이 있는
수업을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습니다
어떤 때는 인생을
몇년 쯤 미리 살고 있는 선배로,
어떤 때는 개그맨
같은 위트와 장난으로
아이들과 호흡을 같이 했습니다.
고입 연합고사가 있던 때였는데
특수지 학교로
연합고사 성적과는 상관없이 입학한
나의 제자들은
마음은 착했지만
애시당초 공부는
마음에도 없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가출한 어머니,
바람난 아버지,
아이들은
병든 가정의 문제들로
가슴 아파했습니다.
나를 누나로 생각하고
가출하기 전에
한번 내게 상담을
해보고 싶었노라고
고백하며 우는 제자들.
그때 나는
부모는 부모의 인생이 있고
너희에게는 너희의 인생이 있다고
충고했습니다.
나 역시 부모님이
화목하게 산 것은 아니었기에
부모님 문제로 너의 인생을
망쳐서는 안 되지 않느냐?
그럴수록 더 멋지게 살아야 한다고
내 체험까지
들려주며 그들을 다독였습니다.
그해 봄부터 가을까지
아이들과 나는 하나였습니다.
사립공채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나오던 날
아이들은 울면서
교문 끝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그해 사립공채에서
여자 국어교사는 1명만 뽑았고
나는 그 시험을 거부하면서
교사의 길을 접었습니다.
올해초 이사를 하기위해
서랍을 정리하다
그때 제자들이
내게 보낸 한 뭉치의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이 학교에 와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고
국어라는 과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구요.
수업시간마다 웃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선생님과
저희 악동들이 이루는
국어 시간은 언제나 재미있고
활기차기만 하지는 않았죠.
상황을 망각한 채
계속 지저귀는 저희들
때문에 속도 많이 상하시고
흰 머리도 늘어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누나 같고 또 친구 같아요.
언제나 박력을 최고로 삼으시고
수업시간을
사나이 못지 않는
여성의 박력으로
꽉 잡아 놓으시는 선생님!
그 박력
패기 잊지 마세요. 」
「선생님이 가시고 난 뒤
국어시간이 너무 심심해졌어요.
목이 쉬도록 열심히
우리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 자꾸 보고 싶어요.
선생님 꼭 시험에 붙으셔서
저희 학교로 돌아와 주세요.」
아이들의 편지를
읽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힘들기만
했던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 때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준것은
너무 작은 것이었는데
아이들은 내게 그들의
마음을 다 주었음을
수십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선생에게
한 없는 사랑을 주었던
제자들에게 늦게나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