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늦잠을 자고 싶어하는
남편과 큰아들을 서둘러 깨웠습니다.
카이스트 기숙사 입사일.
일요일에 가도 되지만
하루라도 빨리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하고싶어서
아침을 빨리먹고 대전으로 향했습니다.
학생식당 바로 옆 사랑관 2층이
큰아이가 앞으로 1년간 지내게 될 기숙사.
큰책상에 고시원용 작은 침대.
아마도 잠을 자기 보다는
공부를 많이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듯한
방안 풍경이었습니다.
가까운 마트에서
미처 준비해오지 못한 물품들을 사고
돼지갈비와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떼운뒤 기숙사를 나섰습니다.
이제 만 17세.
아직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은
어린아들을 떼놓고 나오려니
가슴한구석이 시려왔습니다.
아직 철이 덜나
초등학생인 동생과 치고 박고 싸울땐
하루라도 빨리
카이스트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막상 한동안 못본다고 생각하니
더많이 아껴주지 못한것이
후회스러울뿐이었습니다
큰아이는 어릴때 많이 업고 다녔습니다.
5살때 까지 들춰업고
친정으로 친구들 집으로
씽씽 잘도 다녔는데...
허리가 아플 정도로
많이 업고 다녔지만
이렇게 빨리 떼어 놓을줄 알았다면
더많이 업어줄것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
엄마들이 말하길
진정한 엄마의 아들은
백수 신용불량자 밖에 없고
의사 판사는 장모의 아들
정말 잘키운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 된다는데
이제 엄마의 아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해서
나라의 아들이 되주길 바랄뿐입니다.
이런 나의 바램은
큰아들이 과학고에
들어갈때도 했었던 것입니다.
중학교 내내 전교1등을
고수한 내신성적과
동네 학원에서
토요일 일요일까지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과학고에 합격한 아이였기에
잘해주리라 믿었습니다.
3월엔 바라던대로
전교부회장에 당선되어
154명 영재를 대표하는
아들을 보며 뒷바라지가 힘들어도
자랑 스러웠지요.
노트북에 미국연수까지
월수입150만원으로
힘겹게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
내겐 그 모두가 부담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멋지게 아들을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저의 헛된 꿈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원 한번 안다니고도
중학교에 수석으로 들어간 아들이었기에
믿고 또 믿었는데...
과학고 첫시험 아들은 깨지고 또 깨졌습니다.
중학과정만 마치고온 아이는
이미 고등학교수학, 과학을 2번이상 공부하고 들어온 친구들의 상대가 될수는 없었지요
아무리해도 안되는 상황.
살아 오면서
한번도 느끼지 못했을 절망속에서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전교 139등,
154명의 아이들이 성적순으로 한줄로 늘어선
가운데 맨뒤에 서야하는 현실.
동생들은 붙기도 힘든 학교에
꼴찌로 붙은줄 알고있었다며
뒤에 15명이나 있으니
정말 열심히 한거라고
저를 위로 했지만
억울하고 답답하기만 했지요.
더 속상한 것은
과학고 처음 성적은
변함없이 끝까지 간다는
선배어머니들의 말이었습니다.
실력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 세상에서
언젠가 한번은 깨져야 한다면
빨리 깨질수록 좋다고 말했던 나였는데
아들의 아픔은
내아픔보다 몇배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큰아이가 썼던 입학원서에
그때 상황이 자세하게 나와있어 인용해 봅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중간고사를 보기 전까지는
학교생활에 즐거움만 가득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중간고사를 치루면서
제실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첫날 시험부터 망치니
책상에 앉아도 공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저의 첫 중간고사는
엉망으로 끝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처음 받아본 성적표는
저로 하여금 충격의 늪으로 빠져들게했습니다.
이제껏 중학교에선
한번도 최상위권을 놓쳐본 적이 없었는데
첫 성적표에는 3,4등급은 커녕
7,8,9등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성적표가 나온 며칠동안은
슬픔에 쌓여 기숙사 침대에서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울고 있을때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지금껏 쌓아왔던
나의 모든것이
무너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서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먼저 제가 부족한 부분들을 되짚어 보고
그부분들을 채워 나갔습니다.
성적은 생각만큼 올라주지않았습니다.
그래도 처음의 각오 그대로
더이상 좌절하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힘든적도 많았지만
나를 걱정해주는
가족, 친구들이 있었기에
이겨낼수 있었습니다.ㅡ 입학원서중
당장 학원부터 알아봤습니다.
1년 반동안 공부한것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과학고 사정상
남은 시간이 너무없었습니다.
형편이 좋으면
과학고 출신 선배들에게
과외를 받는 것이 좋겠지만
토,일수업에 50만원이라는
학원비도 내겐 과한 지출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공부를 하고 온 친구들이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라면
우리 아이는 모래바닥이었습니다.
잠을 안자고 공부를 했지만
공부한것은 어디로 숨었는지
좀체 성적과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교부회장인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차라리 임원이 아니었으면
덜 부끄러웠을텐데...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늘어난 학원비를 벌기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름방학 직전엔
봉사활동 도우미 엄마들을 대표해서
1학년 학생들의 봉사활동을
이틀동안 보조했습니다.
힘든일이라 모두 하기 꺼려했지만
기쁜마음으로
정신지체장애우들이 있는 곳을 찾아
봉사를 했습니다.
일을 진행하다보니
다음해도 하던 사람이
하는 것이 나을것 같아
2년 연속 도우미를 자처했지요.
몸으로 할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서
아들의 앞길을 열고 싶었습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에는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했고
학원 공부시간도 늘어났습니다.
그만큼 학비도 늘었는데
결국 더이상 감당할수 없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들에게 학원을 그만 두라고 말한뒤
그동안 많이 도와주신 학원선생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더이상 학원을 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엄마올림"
당시 저의 상황은
신용불량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대출받은 은행이자에
내게 무슨일이라도 생기면
아이들 끝까지
공부할수 있도록
하기위해 들은 종신보험료와 학원비.
30만원씩 내야하는
과학고기숙사비까지
버틸수 있는 그끝자락에서
저는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어 버렸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조금만 더 뒷바라지를 하면 되는데
이제 몇달 남지 않았는데...
부모로써 아무것도
더이상 해주지 못하는
저의 처지가 처량하기만 했습니다.
4년째 생활비를
주지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고
변변한 직장하나 없이
프리랜서로 이집 저집 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아이는 공부를 하겠다고
몸부림을 치고있는데
부모가 그앞길을 막아야만하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1시간도 안지나서
전화가 왔습니다.
학원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는 잘 하고 있는데요.
조금만 있으면 2학년 중간고사인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는 아무말도 할수없었습니다.
다만 울먹이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란
말만 되뇌였습니다.
다른 선생님과도 의논해 보았는데요
**이 마음 안다치게 잘 이야기 하고
그냥 무조건 보내주세요.
**가 없으면 선생님들이
공부 가르칠 맘이 안든다고 합니다.
어머니 , **에겐 말하지 말고
내일부터 학원 보내주세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도움의 손길이 제게 왔습니다.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아들이었지만
큰아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학원을 갔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각오와
선생님에 대한 감사를 간직하고
공부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2학년 첫 중간고사
시험을 끝낸 아들에게 전화를 했지요.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유난히 밝고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100등안에만
들어주길 바랬는데
결과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전교 43등.
1학년때보다 100등 가까이 오른 아들.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들은 다시 일어나 주었다.
모두 내일 처럼 축하해 주었습니다.
1학기가 끝나자
곧 입시가 다가왔지요.
1학년때는 연세대 가는 것도
힘든 성적이었지만
카이스트까지 꿈꿀 성적이 나와서
과감하게 카이스트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성적 합산.
1학년 60퍼센트
2학년1학기 40퍼센트를 반영하는데
1학년 성적이 너무 안좋아서
카이스트 합격은 힘들기만 했습니다.
다만 선행학습없이 들어와
비약적으로 성적이 오른 학생들은
한두명 합격한 일이 있어
그1프로에 기대를 걸어보았습니다.
원서를 내고 기다렸습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전문성 합격이예요.
면접만 보면 되는 인성이 아니라
수학,과학 심층면접을 봐야하는
전문성이었지만
너무 기뻐 꿈인지 생시인지
자꾸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전문성시험을 보러
그전날 남편까지 함께 대전을 갔습니다.
여관방에 공부하는 아이 혼자 놔두고
남편과 막걸리 한잔에
부추전을 나누어 먹으며 회포를 풀었습니다.
두시동생 대학 뒷바라지에
주식을 하다 감당할수 없는 빚까지 져서
저를 힘들게한 남편이지만
기쁜일 슬픈일을 함께하는
영원한 친구 입니다.
지금도 처음 그마음 변함없이
신뢰하고있고
누군가 대신 죽어야
남편이 살수있다면
기꺼이 대신 죽어줄수 있는 저인데
생활이 어렵다고
굳게 잡은 두손을
놓을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견디며 살아온 덕분에
큰아이가 잘하고 있으니
감개무량할 뿐입니다.
수학,생물 시험 모두 잘치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카이스트에 합격해서
가끔 대전을 함께 오면
좋겠다는 말을 하며
남편과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발표를 기다렸어요.
연대면접 보러가야하는 전날
카이스트 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먼저 알게된 엄마들이
내게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
합격이예요.
내옆에 서서 합격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이 힘차게 하늘로 뛰어올랐습니다.
너무 기뻐 팔을 번쩍들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믿어지지 않았고
지난 2년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아이가 잘 해주었고
또 주변에서 도와준 분들이 많았습니다.
바라기는 큰아이가 지금까지의 고생들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값진 연단으로 생각하고
늘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남들은 과학고에 입학하면
내신에서 큰손해를 본다고
또 준비없이 가면
바닥만 깔아준다고말렸지만
과학고에서 아들은
너무 많은것을 얻었습니다.
제일 먼저 겸손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친구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아이들과 경쟁하며
바닥까지 추락하고나서
전에는 결코 느낄수 없었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다음은 자신감
아무 준비없이 들어와서
철저히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서면서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할수 있다는 신념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것을 얻었는데
그것은 평생 함께할 친구들을
사귄것입니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아이가 성적이 안좋을때는
가슴으로 울고 다니고
혼자 생활을 꾸려나가느라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아픈만큼 많이 커버린
아들을 보면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베풀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이 쓴 글 한편을 덧붙여봅니다.
제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은
강영우 박사의
"꿈이 있으면 미래가 있다." 입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시절 축구를 하다
실명을 하게된
강영우박사의 책을 본뒤
잠시 눈을 감아 보았습니다.
익숙했던 주변의 사물들이
갑자기 나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 되어 버립니다.
혼자서는 그무엇도
할수 없을것 같은
어둠속엔 두려움만 가득합니다.
강영우박사의 실명으로 인한
충격때문에 돌아가신 부모님,
졸지에 고아가된 동생들을 위해
생계를 이끌어가던
누나의 죽음까지 겪으며
인생의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난
강박사의 삶은 제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오르지 않았을때
꿈이 있으면 미래가 있다고
제게 말해준
사람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그의 처지가 너무나 비참했기에
미국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위원이 된
오늘이 더욱 빛나게 느껴집니다.
어린시절의 고난과 장애를
오히려 삶을 헤쳐가는 능력으로 바꾼 그는
온몸으로 어떠한 순간에도
희망을 가질것을 말해줍니다.
또 섬김을 받는 지도자가아니라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친구들보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원망한 적도 있고
선행학습을 하지못한 처지를
비관한 적도 있었지만
그모두가 변명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남들보다 너무 많은것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앞으로 갚아야 할것이
더 많은 사람임을 느꼈습니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나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