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집.
동네에서는 우리집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담 옆에 심어 놓은 포도나무는 해가 갈수록 줄기가 굵어지더니 이사를 가야 하는
그 해엔 포도가 수십 송이 열렸습니다.
집장사가 지은 집이라 동네집들의 모양은
모두 똑 같았지만 우리 집만은 그 포도나무 때문에 다른 집과 달랐고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었습니다.
포도나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작은 텃밭엔 상추,열무,고추,배추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고 가지,토마토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주변엔 보라색 분홍색과꽃과 노란 붓꽃이 수줍게 피어 있었습니다.
맨몸으로 서울에 온 부모님들이 힘들게 장만한 집이었기에 어머니는 막내 동생을 업고서 집을 쓸고 또 닦았습니다.
집을 사기 위해 진 빚을 갚기 위해 우리 밥상엔 김치와 콩나물 국 또는 우거지 국이 올라 왔습니다.
우거지 국은 어린 내가 시장에서 쓸만한 배추잎을 주워오면 어머니께서 끓여 주시는 특별 메뉴였어요.
배추잎을 푹 끓여 숨을 죽인 다음 멸치와 된장을 넣은 물에 파 송송 썰고 고춧가루 솔솔 뿌려 먹는
우거지국밥은 한 그릇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하는 영양식이었습니다.
내 국그릇의 멸치가 동생 국그릇의 멸치보다 한 마리라도 적으면 괜히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푼 두푼 아끼며 살았지만
아버지의 실직이후 어머니 아버지께서 은행 이자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잦아 졌습니다.
오빠와 나는 우리라도 돈을 벌어 부모님을 돕자고 결심하고 떡볶이를 만들어 팔기로 했습니다.
쌀떡은 비싸니까 밀가루를 반죽해서 긴 떡 모양으로 만들고 고추장과 물을 넣었습니다.
내 친구들이 첫 손님이었습니다.
학교 앞에서 파는 것 보다 많이 준다는 말에 코 묻은 돈 10원을 들고 온 친구들 .
준비된 밀가루 반죽 떡은 그러나 고추장,물과 섞여 먹을 수 없는 붉은 죽이 되었고
오빠와 나의 사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사업은 롤러 스케이트 대여업이었습니다.
저금통을 털어 그때만 해도 귀했던 프라스틱 롤러스케이트를 샀습니다.
한번 타는데 10원 매일 열명만 타도 우리는 금방 돈방석에 올라 앉을 것 같았지요.
그러나 두 번 대여 후 바퀴가 빠지고 끈이 끊어져 들인 돈마저 찾지 못한 채
집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해 우리집 포도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익기 전에는 절대 따 먹지 말라고 했지만
오빠와 나 그리고 동생 들은 시기만한 파란 포도를 눈물을 찔끔 흘리며 몰래 한 알씩 따먹곤 했습니다.
그러나 포도가 다 익지도 않았는데 은행빚을 갚지 못해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포도나무 집, 우리집......
지난 3년간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했었는데 그 행복마저 그 집에 놔두고 나와야 할 것 같았습니다.
까맣게 익어가는 포도들을 그렇게 고스란히 놔두고서 우리 식구들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차 안에서 어머니는 고개를 치마폭에 파 묻은 채 서럽게 우셨습니다.
그 이후로 꿈속에서만 찾아가는 포도나무집.
포도는 그때마다 줄기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
40여년간 살아오면서 참 많은 이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성장을 했고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아 키우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집을 장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사는 집 담 옆엔 포도나무를 심고싶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정성껏 키워 포도가 열리면 한 바구니 가득 따서 이웃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모두와 나누는 그런 마음으로...
그때가 되면 내 마음속의 포도나무는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도 무럭무럭 자라게 되겠지요.
늘 꿈꿔왔던 포도나무를 테라스 텃밭에 심고
8년 살고 올해 2월 이사 나왔습니다.
한약찌꺼기 10포대를 넣고 키운 포도나무엔
포도가 100송이 가까이 열렸습니다.
이제 또다시 포도나무집은 꿈속의 집이 되었네요. 그래도 해마다 포도는 우리가족 모두의 마음에 열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