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들을 낳고
아들 기저귀 값이나 벌어야 겠다고
결심하고
학원 강사를 시작한것이
94년 이었습니다.
다행히 재미난 수업을 한다고 인정 받아
3년을 방이동 한학원에서
근무하며 잘 지내고 있었지만
결국 학원 경영이 어려워져서
150만원의 월급은 받지 못한채
학원은 망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는데
원장님 사모님이 100만원을 입금했다고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하다고
남은 돈은 정말 안주셔도 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학원 경영 3년만에
강남 아파트 2채를 날리고
단칸 지하방으로 이사간
원장님네 가족을 생각하면
그나머지돈을 받을수는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전화 너머에서 원장님 사모님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딸 처럼 젊은 강사들에게 월급이 늦어져
욕까지 들었는데
저처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이보답은 꼭 하겠다고 하시며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그로부터 몇주뒤
강남에 개인지도 자리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일주일에 두번
중학교 1학년 학생 두명이었습니다.
그중 한명 성원이를 가르치며
저는 국어선생에서
논술 선생으로 거듭 나게 되었습니다.
성원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공부는 정말 싫은 아이였습니다.
당시 연합고사가 없어지고
내신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게 되면서
전과목 과외가 필요하게된 아이였지요.
즐겁게 수업을 했고
덕분에 국어성적도
80점대로 올라갔습니다.
성적이 올라가자 성원이 어머님은
제게 가디건도 선물하시고
가끔 맛난 저녁 반찬도 싸주시며
함께 앉아 서로의 고민도 이야기하는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국영수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까지 내신대비 과외를 하느라
생활비의 거의 대부분이 들어간다고
푸념을 하셨지요.
그러고 보니 성원이 어머님이 집에서 입는 옷은 전부 낡은 티셔츠였고
구멍까지 뚫려 있더군요.
무서운 아빠 몰래 하는 과외라서
모아둔 비상금이
다 없어질 지경이었습니다.
그상황에서 제가 할수 있는 것은
성원이가 국어를 잘할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이라 생각하고
더 열심히 가르쳤지요.
그러던 어느날
저도 싫어하는
문법 시간이 닥쳐왔습니다.
성원이는 너무 하기 싫어
몸을 뒤틀고 졸고
수업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책을 덮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차라리 글짓기 수업을 하자
결심하고
신문을 뒤적였습니다.
어려운 글은 다 패스하고
독자의 편지를 읽고
토론한뒤 느낀 점을 쓰라고
아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독자의 편지는
후일 아름다운 티브 동화에도
나온 미담이었습니다.
암에 걸린
아버지의 투병때문에
집을 팔고 지하셋방으로
이사온 어느 효자가
신문에서 강원도 비수구미 마을의
어느 농부가 암에 특효약인
자연산 상황버섯을
발견했다는 기사를 발견
무작정 찾아간 이야기입니다.
물어 물어 그농부의 집을 찾아간
효자는 무릎을 꿇고
비록 돈은 없지만
아버지를 위해 상황버섯을조금만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농부 아저씨는
집에 보관 중이던 상황버섯을
전부 아들에게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농부는
당신처럼 하늘이 내린 효자를 돌려 보내면
훗날 우리 아들에게 효도 하란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며
돈 한푼 받지 않고
버섯을 효자에게 주었습니다.
독자의 편지는
이농부 아저씨께 고마움을 표한
효자의 감사 편지였습니다.
재미있고 가슴 찡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글을 읽고 저의 사랑하는 제자가 쓴 글은
첫 문장이 골때린다 였습니다.
골 때린다.
부모는 부모고 나는 나인데
부모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내집을 팔아서 뒷바라지를 한
아들도 골 때리고
그 비싼 상황버섯을
팔지도 않고
남에게 모두 주어버린
농부 아저씨도 골 때린다.
아무튼 모두
골 때리는 사람들 투성이 이야기를
읽고 글을 쓰려니 나도 골 때리는 중이다
이런글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원이가 자수성가한
엄격한 아버지는 무서워 했지만
성원이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고마움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나는 나.
부모는 부모
냉정하게 줄을 그어놓았더군요.
돈 가는데 마음 간다고
아들 고등학교 한번 보내볼려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생활하는 엄마의 마음은 오히려
귀찮은 간섭이었나봅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모른채
감사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아이가 되어버린것은 아닌지 ...
하지만 이대로 성원이를 버려두기에는
성원이 엄마의 간절함이 , 그리고 저를 챙겨주는
그마음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수학이나 영어보다
그래도 국어가 아이들에게
인생을 살아갈 바른 길을 가르칠 수 있는 과목이라 생각하고
국어교사가 된 사람이기에
그날부터 저는 일주일에 한번
30분씩 성원이를 붙잡고
글짓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교재는 주로 신문이었습니다.
짧고 간결하지만
그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없이 가르쳐 주는 글들을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글을 쓰고...
조금씩 아이가 달라졌습니다.
공부하란 말만 했지
누구도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기에
아이는 자기가 이해할수 없는 일은
골 때린다고 말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귀한 과외시간에
하라는 시험대비는 안하고
신문 읽고 요약하고 쓰고 했으니
저는 불량 과외교사 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그수업에서
부모님도 선생님도
말해주지 못한
인간의 바른 길을 스스로 알아갔습니다.
3년쯤 그런 수업을 하다 성원이와는 인연은 끝이 났습니다.
2년 6개월뒤
성원이 엄마가 논술팀을 짰다고 연락이 와서 여름방학 동안 단기로
성원이와 그친구들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첫 수업
교재는 그당시 큰사건이었던
씨랜드 화재로 유치원 아이들이 모두 죽은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였습니다.
어른들의 부주의와 안전 불감증이 부른 인재.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재가 되어버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쌍둥이였던 형제는 그순간 꼭 껴앉고 있어서 맞붙은 셔츠는 타지 않았다는
기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군요.
중대 미대 지망인 성원이, 영국유학 갔다가 돌아온 서울대 지망생, 연대 철학과 지망인 아이
이렇게 셋이서 조용히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1시간 뒤 아이들이 낸 글을 첨삭하던
저는 성원이의 글을 읽으며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몇년만에 만난 성원이는
가슴 아픈 사건에 같이 아파하며 우리 사회와 어른들을 준열히 비판하고
아이들의 명복을 비는
감동적인 글을 써낸것입니다.
이것이 골때린다는 글로부터 시작된
저와 성원이의 논술수업 이야기입니다.
저는 성원이의 가슴속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었습니다.
그씨앗을 몇년동안 성원이는 큰 나무로 키워놨더군요.
아이들의 가슴에 작은 씨앗을 심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저는 성원이 덕분에 논술교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바쁘게 논술교사로
살아가는 어느 날
성원이 엄마가
멀리서 저를 보고 뛰어 오셨습니다.
미국 대학으로 유학간 성원이가 처음 1년간은 영어 때문에 고생했는데
이젠 영어가 편해져서
미술 철학 시간에 써낸 에세이에
교수님이
엑설런트라고두번 쓰고
느낌표 팍팍 찍어 주고
영혼을 울리는 글을 써줘서
매우 감사하다는 평을 써놨다고
자랑을 하시더군요.
그날 저도 너무 기뻐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