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던 여름이 이제는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는 9월의 시작입니다.
오늘 일요일 아침 간단한 점심 준비를 하면서 결심을 한 것이 있어요.
그 결심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제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왜 나는 요즘 키친토크 게시판에 자주 오지 않는가?
요리랄 것도 없이 대충 해먹고 살아서 그렇지...
그래도 굶은 것은 아니니 대충 해먹은 것이라도 뭘 해먹긴 하지 않았니?
에이, 아무리 그래도 냉동 식품 데운 것을 어떻게 게시판에 올리겠어...
여기는 키친 "토크" 게시판이니 뭐라도 부엌에서 하고픈 이야기가 있으면 쓰면 되지 언제나 멋있게 잘 차린 음식만 사진으로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네 스스로 말하고 다니지 않았니?
맞아... 그랬지... 그리고 여기 게시판 독자님들은 이러나 저러나 격려해주고 도닥여주는 분들이잖아?
멋진 음식 사진을 도맡아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재기발랄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별볼일 없는 음식일 망정 가족들 해먹이고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나누는 나 같은 사람도 다같이 어울리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제가 82쿡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할 줄 아는 요리가 늘었고 사진을 찍어서 글을 쓸 시간도 많아 졌는데 예전만 못하게 활동을 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어요.
그리고 어제 저녁에 결정적으로 냄비를 태워먹는 사고를 쳤어요 ㅠ.ㅠ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저희집 싱크대는 쿡탑을 외면한 채 일해야 하는 구조인데다 쿡탑 위에 달린 후드가 일을 너무 잘해서, 된장찌개 남은 것을 상하지 않도록 한 번 끓여두어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불을 켜놓고 설거지를 하다가 그만 된장찌개를 까맣게 잊고 방으로 들어가서 재미난 드라마를 보며 뜨개질 놀이를 한참 했지 뭐에요. (아무도 없는 숲 드라마, 정말 재밌어요!)
아들과 남편이 온집안에 가득한 연기와 탄내를 불이 나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었죠 ㅠ.ㅠ
과탄산이 좋긴 좋더라구요 ㅎㅎㅎ
담배냄새가 나는 된장 재가 이렇게 없어지다니... ㅋㅋㅋ
다음부터는 쿡탑이 켜져 있는 동안은 잠시라도 불 앞을 떠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했습니다.
예전에 아이들이 어릴 때는 멀티태스킹으로 요리를 하면서 설거지도 해치워야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한 다음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급하게 촌각을 다투며 일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초심으로 돌아가서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기 - 그게 바로 저를 오늘 키친토크 게시판으로 이끌어준 원동력이었어요.
하나의 게시물에 여러 가지 요리가 많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 때를 기다리다보니 게시판에 오는 것이 뜸해지니 한 번에 하나씩만 요리 사진을 보여드리고 대신에 "토크" 부분에 조금 더 시간을 쓰자! 라고 생각했어요.
가족들 해먹이는 식사 준비도 한 끼에 한가지씩만! ㅎㅎㅎ
오늘 아점과 점저 (=하루 종일 아무때고 먹고 싶을 때 퍼먹으라고) 메뉴는 새우를 많이 넣은 파스타입니다.
아트 선생님이 나눠주신 냉동새우가 맛이 좋아서 파스타 소스는 일부러 넣지 않았어요.
파스타 면은 가장 가느다란 앤젤 헤어입니다.
이 면이 조리 시간이 짧아서 좋고 양념이 잘 스며들어 맛도 좋더라구요.
다른 재료 없이 마늘과 양파만 쓰기로 했어요.
저는 요리할 때 칼과 도마를 작은 것으로 쓰는 걸 좋아해요.
키친아일랜드 상판을 보호하는 스텐 도마가 크게 펼쳐져 있어서 그 위에서 바로 칼질을 해도 되지만 칼날을 보호하고 거슬리는 소리를 줄이려고 칼날이 닿을 정도의 면적만 작은 도마를 놓고 써요.
양파나 마늘은 재료 자체가 작으니 과도로 썰구요.
너무 잘 드는 칼이나 큰 칼은 제가 무서워서요 :-)
저 스텐 도마 (또는 상판 덮개? 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커요)는 참 유용해요.
스텐이어서 물들지도 않고 관리가 편하거든요.
살림살이 도구 이야기가 나온김에 제가 애정하는 도구 하나 더 보여드리죠.
실리콘 뒤집개입니다.
큰 것 작은 것, 편편한 것 숟가락처럼 오목한 것, 네 개 한 셋트로 브라질의 큰 밀림 닷 컴에서 산 건데 후라이팬 코팅 긁힐 염려없고 기름이나 고추장 같은 것은 아주 깔끔하게 싹~ 긁어주어서 참 좋더군요.
잘게 썬 양파와 마늘에 버터를 넉넉하게 넣고 볶아서 풍미 좋은 버터가 되면 새우를 넣고 익힙니다.
깨끗하게 손질해서 얼린 제품이니 헹구지 않고 바로 넣었어요.
새우를 볶으면서 면 삶을 물을 끓입니다.
지금부터는 절대로 네버에버! 딴짓 안하고 불에 집중합니다.
그래야 냄비가 넘치거나 후라이팬이 타는 일이 안생기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중년 누이가 되고보니, 두뇌활동도 중년이 되어 빠릿빠릿했던 기억력과 순발력은 점차 슬로우다운 하고, 대신에 넓게 보고 깊이 깨닫는 통찰력은 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차피 기저귀 갈아주고 밀착 보살핌을 해야 했던 아이들도 다 자라서 시간도 많아졌으니, 서두르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
차근차근!
새우가 익으면서 국물이 흥건하게 나오니 면을 완전히 익히지 않고 아직 살짝 뻣뻣한 정도일 때 건져서 함께 볶/끓 했습니다.
새우 국물 덕분에 간은 소금을 아주 조금만 추가하고 후추 갈아 넣고 파슬리 말린 가루는 색을 더하려고 뿌렸어요.
둘리양은 아점으로 한 그릇 먹었고, 코난군은 테니스 레슨에서 돌아오면 한 그릇 먹을 예정이고, 남편은 뭐... 때되면 알아서 찾아 먹겠죠 ㅎㅎㅎ
초심으로 돌아가려 노력하는 소년공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