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중독, 일 좋아하는 나,
이민 와서도 양쪽나라 명절 음식을 즐거움으로 차려냈다.
설에는 만두, 추석에는 송편 빚고
이스터에는 햄, 땡스기빙에는 터키, 크리스마스에는 로스트비프를 한다.
만두, 송편은 혼자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으므로 동창들, 동네아우들, 향우회 하물며 케네디안친구들도 불러들였다.
일 하러 오라고 불렀으니 밥과 술을 제공해야 할 것 아닌가!
만두가 터져도..
송편이 속도 없어도..
찌면서 물이 없어 타도 모르는 수다삼매경!!
그런 왁자지껄이 바로 나의 유년기 기억속의 명절이였다
동지 지나 섣달 들어서면 할머니는 하루종일 가마솥에 장작을 때어 조청을 고으고 엿을 만드셨다.
안방 아랫목이 설설 끓으면 놋대야에 찬물을 담아 여기저기 두어야했다.
부엌에서 아가~~~ 부르면 냉큼 뛰어갔다.
장독 뚜껑에 한바가지 퍼 부은 엿을 마당으로 운반하는 것이 나의 일.
섣달 추위에 엿은 금방 굳어서 투명한 갈색,
탁탁 깨질 정도 갱엿이 되고
굳기 전에 모양을 만들어 깨도 뭍히고 콩도 섞고..
네모난 대바구니에 기름종이를 깔고 차곡차곡 쟁여 다락에 두셨다.
그렇게 조청과 엿을 고으는 일로 명절 준비가 시작되었다.
쌀을 불려 리어카에 싣고 막내삼촌이 큰고개(공덕동에서 서소문 넘어가는 고개) 방앗간으로 끌고 갔다오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길게길게 다라이에 담겨왔다.
적당한 길이로 자르는 동안 엄마를 졸라서 떡을 얻고 할머니가 주신 조청에 푹~~~
잠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한다는 어른들의 농담으로 눈 부릅뜨고 있었던 섣달 그믐날 밤,
만두는 몇백개를 만들었던 것 같다.
빚은 만두를 밖에 내어 놓으면 그대로 띠글띠글 얼어붙었던 그 추위도 기억난다.
육촌 시누이가 결혼해서 오는 첫 명절이라고 만두속에 고추가루를 듬뿍 버무려 특제만두를 하나 만들었다가 새신랑 떡국에 넣어주었던 숙모들의 장난...그걸 말해주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던지 ..
해라도 반짝 나는 날은 가마니를 잘라 펴고 놋제기를 꺼내 닦으셨다.
기와지붕 조각을 갈아서 짚수세미로 빡빡 닦아 물로 씻으면 신기하게도 반짝하며 윤이났다.
삼촌넷과 숙모들, 사촌들, 작은할아버지들, 고모할머니, 오촌 당숙들이 다 모이니 밤에 잠자리 찾는게 그야말로 북새통..
추석에는 송편을 몇 말 정도 했다.
원래 손이 많았으니 일도 아니였다.
솔잎을 켜켜로 깔고 한 솥을 찌면 할머니는 차곡차곡 손잡이 달린 바구니에 담아 대들보에 걸린 걸게에 걸어 놓으셨다. 쉬지않고 쫀득하게 보관하신 지혜.
녹두를 타서 껍질 벗겨 불리는 물에 치자 한두송이 깨어 넣어면 주홍색 물감을 풀은 듯 .
맷돌을 돌려 갈아내어 부친 녹두빈대떡, 돼지기름이 지글지글 하기에 나는 입에도 안댔다.
쪼무래기 내가 숙모들 틈에 끼어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들의 수다에 킥킥대면, " 아가~~밀가루나 탈탈 털어라!"
전 부치는 과정중 밀가루 묻히는것이 내 임무였다.
전도 종류별로 한 채반씩!!
할머니 안보실때 얼른 맛을 본다고 하나씩 먹으면서 " 산 조상이 먼저" 라며 낄낄거렸다
모두 표현할 길 없는 유년기 추억을 회상하며 지금의 자리를 돌아본다
그 세대들이 벌써 다 떠났고
그 모습을 기억하는 나도 이젠 그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고..
이제는 새로운 양상의 명절 풍습이 만들어 지고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어제 7명, 새동네에서 만나게 된 모임에서 점심을 먹고난 후..
"오후에 추석송편 만들건데 필요하신 분들은 우리집에 와서 만들어 가세요.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네가 다른가???
" 언니, 그런거 왜 해요???"
"힘든 일 하지 마세여 "
결론..
내 또래 한분이 우리집에 오셨다.
둘이 오손도손 만들어 쪄서 나누고 저녁에 손녀도 한접시 만들고..
이젠 나도 바뀌어야 한다.
내가 생각을 바꿔야한다.
그런거 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