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백수로 보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저의 백수기반은 국민연금 조기수령입니다.^^)
나를 지배했던 신념은 무엇이었나?
유년기부터 쭉 따라오는 내 몸 실핏줄까지 새겨진 것은?
효도? 성실? 부자?결혼? 근면?
다 재미없는 단어들이지만 내게 새겨진 인장같은 것들입니다.
반항하고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니
적당히 피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아예 그 신념들 털기하는 중입니다.
나를 회복시키는 데 집중했습니다.
원래 저는 잘 웃고 잘 놀고 눈물도 많고
깡도 센 편이였는데 어느 지점에서 돌덩이처럼 감정을 잃었습니다.
뭘 봐도 그저그렇고 무표정하고 맹한 그런 얼굴을 자주 봅니다.
일단 잠을 많이 잤습니다.
잠이 덜 깬 채 학교에 갔고,
술도 덜 깨고 회사에 갔고
맨날 잠이 덜 깬 아침을 맞이 했습니다.
아침이 아침다워야지 아침이 그렇게 두려운 생활을 해왔으니
밤만 되면 부어라마셔라 밤과 아침의 경계불안을 계속 안고 살았던 거지요.
지금은 아침이 당연히 좋습니다.
커피내려 비어진 주차장을 내려 보면서 백수자뻑도 해봅니다.
치킨집 서너 시간 걸릴 때 닭볶음탕 시키는 잔재주^^
월드컵, 축구
2002년 처음 축구를 봤습니다.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더랬습니다.
다리가 부셔져 장기입원환자였습니다. 옥상에 빔 틀어놓고 환자들 식판과 생수통 들고
올라와 기브스한 팔다리로 두드리고
으하하 장관이였습니다.ㅎㅎ
홍명보? 홍콩배우 홍금보 동생인가?
그랬습니다.
20년이 지난 후 다시보는 월드컵
축구가 이리도 날 것이였나? 내가 내 얼굴에서 회복하고 싶은 환한 웃음과 눈물
펄펄나는 인간의 감정들이 거기에 다 있었습니다.
보는 저도 당연 그런 얼굴이였지요.
그래서 축구가 있는 날은 날밤 샙니다.
20년 동안 뭐했나? 당연 축구보다 더 재밋는 연애가 있었을 게고
돈벌이도 있었으니 축구는 그닥 제 일상에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누구는 멈추면 보인다하더만
백수되면 더 보이는 게 많습디다.ㅎ
백선생처럼 먹고 싶은 게 많이 죽지 않은 인류인 제가 위장에 탈이 오지게
나 6개월째 약을 먹고 있습니다.
의사에게 제발 커피와 조금의 술만 마시게 치료를 해달라고 읍소했습니다.
조금 낫습니다. 술의 양은 급격히 줄어 들었고 커피도 아침에만
베란다에 양배추즙이 한 박스 있습니다.
# 그리고
제 식구인 강아지 두 녀석 중 한 녀석이 지난 달에 떠났습니다.
강아지 나이로 19세이니 살만큼 다 살았다고 하는데
아직도 고개만 숙이면 그 녀석이 눈에 밟힙니다.
동물등록에 떠났다고 무슨 신고? 하라는데 여즉 못하고 있습니다.
3주 정도 아프다가 떠났는데 갈 때는 할머니 얼굴이 보입디다.
너가 내 스승이였다고 큰 절 두 번 했습니다.
# 그리하여
이번 겨울에는 다시 러시아소설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한 여름 러시아 소설과 함께 지낸 적이 엊그제인데 겨울엔 역시 러시아입니다.
토지 개정판도 다시 읽어 볼 까합니다.
한 해 동안 저하고 놀면서 내가 참 재밋는 인간이구나
그러면 됐지 뭐.
축구 보면서 시켜먹은 겁니다.
축구 끝나면 시린 속을 아주 부여잡습니다. ㅎㅎ
강아지 보내고 너무 슬픈데 배는 왜 고프고 술은 왜 고파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하는지
망할 식욕같으니라구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