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억으로 두텁떡은 쇠머리떡 같은 것에 비해 쭌득쭌득함이 덜하고 찹쌀모찌 보다는 씹는 맛이 있었던, 그러나 콩고물인지 팥고물인지가 질질 흘러서 깔끔하게 먹기는 조금 어려웠던 그런 떡이었죠.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렇게 상세한 떡 만드는 방법이 나와있기도 하고, 만들기가 까다로운 떡이라서 조선시대 임금님 생신 잔칫상에 올렸던 떡이라고도 하더군요.
보통의 떡보다 두툼하다 해서 두텁떡, 혹은 뭔가 있어보이게 한자로 후병 이라고도 불렀대요.
즐거운 잔칫날에 명왕성에서 떡을 만든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면서 엠비가 조사받으러 가는 뉴스를 보며 팥을 불리기 시작했어요.
ㅠ.ㅠ
도대체 팥이란 놈은 어찌 그리 단단하고 어찌 그리 꽁꽁 감싸 있답니까?
물에 불린 상태로 틈 날때 마다 까고 또 까고...
다 못깐 것은 도로 냉장고에 들어갔다 다음 날 또 까고...
마침내 이 팥을 손으로 다 까던 날, 엠비가 구속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 타이밍 한 번 잘 맞지요?!
내 사랑 인스탄트 팟에 껍질 벗긴 팥을 찌고...
그 다음 사랑, 푸드 프로세서에 찐 팥을 갈아서...
별로 안사랑하는 체에 다시 한 번 걸렀어요.
사실 명왕성에는 제대로 된 체를 팔지도 않아서 이렇게 야채 씻어서 물기 빼는 그물망으로 내리느라 더 많이 힘들었쬬용... 오구오구...
평소의 제 인격이라면 체에 내리는 것 쯤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날라리 스타일 내맘대로 만들겠지만...
제게는 뼈아픈 과거가 있답니다... ㅠ.ㅠ
연식 좀 되신 회원님들은 아마도 이 사진을 기억하실까요?
여러분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제 시루떡 사연은 여기 게시판에서는 사진이 다 지워지고 없더군요.
여기 가면 그 참혹했던 과거 일을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교훈은...
떡을 만들 때 체로 가루를 내리는 것은 절대 빠뜨려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겁니다!
다시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서!
팥을 쪄서 갈아서 체에 내렸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간장과 설탕과 계피가루를 넣고 섞은 다음, 수분을 날려주기 위해서 마른 후라이팬에 볶아야 한다는군요.
무려 30분을 서서 볶았습니다.
너무 센 불에 볶으면 설탕이 타거나 끈적해질까봐 중간 불에 볶으니 아주 지루해 죽을 뻔 했어요.
이번에는 쌀가루를 체로 내리는데...
아참, 이 쌀가루는 명왕성 가정에서 흔히 가지고 있는 제분기로 직접 갈아 만든 것입니다.
지구별의 방앗간에서는 불린 쌀을 눌러서 빻는 방식이지만, 명왕성의 제분기는 마른 쌀을 강력한 모터로 먼지같이 고운 가루로 만들기 때문에 물을 좀 많이 주어야 한답니다.
아직 나의 두떱떡 만들기는 절반도 완성되지 않았어요 ㅠ.ㅠ.
이번에는 소 만들기 입니다.
밤, 감말랭이, 유자청을 잘게 다져 섞어요.
동글납작하게 소를 빚어서 준비해둡니다.
이제 마침내 대망의 떡찌기가 시작됩니다.
이것도 꽤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하지요.
면보를 깔고 팥고물을 넉넉하게 깔고 그 위에 쌀가루 한 켜, 소 얹고난 다음 또 쌀가루 한 켜, 다시 팥고물...
순서를 헷갈리시면 아니아니 아니되오!
마침내!
드디어!!
화이널리!!!
이거이거...
임금님도 나쁜 임금님이나 이런 거 만들어 올리라고 수랏간에 분부하실 떡이더만요...
마누라나 엄마한테 이 떡 함부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가는 떡이 되도록 얻어 맞아도 싸다는...
그래도 어쨌든 완성되었으니 상을 한 번 차려봅니다.
떡먹고 목메일 때 식혜 한 모금이 제대로 된 오마쥬 이쥬 :-)
식혜 쯤이야 명왕성의 흔한 음료라 만들기 과정 샷 같은 건 없어요.
음식을 차릴 땐 어쩐지 삼세번 이라는 숫자가 좋아서 떡 옆에 호박죽도 한 그릇 떠왔습니다.
내 사랑 인스턴트 팟과 함께라면 오만가지 죽은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만들 수 있어요.
자.....
쵸큼 고탄수화물 식단이긴 하지만...
기쁜 날에 단 거 좀 많이 먹고 기분 좀 좋으면 좋잖아요.
이 떡을 82쿡 여러분들께 바칩니다.
임금님이나 잡숫던 공이 많이 들어가는 떡을 지난 몇 년간 수고 많으셨던 여러분들 모두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가족들 아이들 밥 해먹이고...
멀리 혹은 가까이 계신 부모님 봉양하고...
생계유지이던, 자아실현이던, 암튼간에 직장에 나가서 일하시는 분들...
추운 날에 더 추운 현실과 맞부딪혀 촛불 들고 나가셨던 분들...
간절한 마음으로 투표하고 더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을 만들어내신 분들...
그 와중에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을 잃는 트라우마를 경험하신 분들...
1987 영화보며 우신 분들...
모두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헤치고 나갈 길은 많이 남아있지만, 오늘의 떡을 기억하며 힘을 내기로 해요.
삐리 삐릿 뾰로롱~~~
머나먼 명왕성에서 타전한 교신이었습니다, 로저!
(82쿡 화이팅 인증샷 :-)
(풍악을 울리라며 한 쪽에는 바이올린, 아직 남은 일처리는 똑바로 잘 하자며 삼디 프린터로 만들어낸 스타워즈 광선검과 총입니다.)
(사실은 식탁 위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따로 치우기 싫어서 그럴싸하게 갖다 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손가락이 며칠 동안 팅팅 불게 하며 까서 만든 이 팥 고물....
막 흘리면서 먹는 자에게는...
ㅋㅋㅋ
끄~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