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밥, 일요일 아침

| 조회수 : 12,244 | 추천수 : 274
작성일 : 2010-05-10 12:16:20
일요일 아침, 고2 딸아이가 학원에 간단다.
저나 내나 일요일 늦잠은 꿈도 못 꾼지 오래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다들 안쓰러운 인생들이다.’

새 밥하고 어렵게 깨워봐야 몇 술 먹지도 않는 애, ‘그래도 먹여야지 어쩌겠나! 새끼인걸.’
한창 좋을 나인데 누렇게 뜨고 다크서클 작렬한 얼굴을 볼 때마다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어쩌겠나? 주말만이라도 더 자라고 깨우지 않을 용기가 내겐 아직 없는 걸... 해줄 수 있는 아침밥이라도 챙겨 먹여야지.’

냉장고 뒤지니 상추와 비름나물이 보인다.
마눌이 전날 손질해 놓은 생밤도 물에 얌전히 담겨 있다.
밤 넣고 현미밥 짓기로 했다. 상추는 잘게 찢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밥이 뜸이 들자 느타리 버섯도 잘게 잘라 넣고 잠시 뚜껑 닫아 두었다.

비름나물은 살짝 데쳐 된장에 무쳤다. 고추장으로 시큼 달큼하게 무칠까 했으나 ‘아이가 식초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던가?’ 긴가민가해서 그냥 된장에 간장 조금 넣고 무쳤다.


가끔 식구들 입맛을 잊을 때가 있다. 누가 뭘 좋아하는지? 뭘 안 먹는지? 통 생각이 안 나거나 착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내 입맛이 나도 모르게 투영되는 건지, 나이 들어 깜빡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오늘 아침 같은 경우다.

어린 시절, 이맘때면 비름나물은 콩나물 다음쯤의 메뉴로 자주 밥상에 등장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직접 뜯으셨는지 사셨는지 기억엔 없으나 비름나물은 초고추장이나 된장에 잘 어울렸던 흔한 나물로 기억된다.

후후, 사실 그 시절 비름나물은 (최소 우리 집에선)비름나물이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 집에선 ‘비듬’나물이라 불렀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비듬이었는지 ‘시래기 국’의 시래기가 ‘쓰레기’로 들렸던 것만큼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비름을 ‘비늠’이라고도 하던데 ‘비늠’을 잘 못 발음한 것인지 잘 못 들은 것인지 지금은 알 길 없다. 다만 ‘비듬’이란 이름 때문에 깔깔대며 형제끼리 또는 어머니와 웃던 기억만 확인할 뿐.

상큼한 기분을 기대하며 차려낸 비름나물과 밤밥, 양념장은 ‘아니나 다를까!’ 딸아이 젓가락으로 밤만 골라 먹으며 밥알을 세더니 그마저 내려놓는다. 나물과 좀 더 먹으란 말에 늦었다며 씻으러 들어가더니 머리감고 말리고 고데기로 손질까지 하는 눈치다. ‘이구!’ 순간 속에서 열불이 난다. 그 열불 삭이느라 딸아이 남긴 밥 양념장에 비벼 우적우적 밀어 넣었다.

“정말 우라질! 입시, 염병할 교육, 그 앞의 비루한 부모양심과 밥은 굶어도 머리 손질은 해야 하는 아이와 밥 한술이 더 중요한 애비의 차이가 일요일 아침 밥상머리에 있었다.”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쎄뇨라팍
    '10.5.10 12:23 PM

    안녕하세요^^

    정말 공감이가서 글을 남깁니다
    저희 아이도 고2 (여)
    어쨌거나 알콩달콩 가족들간의 일요일 아침의 정서가 마냥 부럽기만합니다

    저희 애는 지금 유학중이라서 ㅠㅠ

  • 2. 프라하
    '10.5.10 12:30 PM

    남자분이 이런 세심함을...^^
    나중이 따님이 크면 이런 아빠의 정성을 알게 되겠지요?
    상추무침에 밥 쓱쓱 비벼서 얌냠,,,맛나겠어요,,,ㅎㅎ

  • 3. 화이트초콜렛모카
    '10.5.10 12:32 PM

    저두 그런밥 먹고 자란 1인인데요^*^
    시집 가서 아들 둘 낳고 살아보니
    엄마, 아빠, 따뜻한 마음 아주 조금은 알듯도 합니다.
    그 마음 전해졌을 거예요..
    이담에 어느 일요일 아침...
    따님도 저처럼 그 마음 알아줄거예요..

  • 4. 상큼마미
    '10.5.10 1:00 PM

    저, 반성모드로 들어갑니다^^
    엄마거든요(?)
    대학2학년 막내딸 매일매일 아침밥 먹지 않습니다.
    미워서 저도 준비안합니다~~~
    저 출근하면, 우유 하나먹고 학교가지요

  • 5. alfonso
    '10.5.10 1:04 PM

    흐미...저 아이 없는 아짐인데요, 진짜 공감가게 쓰셨네요.
    20년전 저를 우리 엄마가 그렇게 보셔서 뜨신 아침밥이랑 국 맨날 챙겨주셨던가...
    엄마 고마워요!!!

    그리고 오후에님 감사합니다!!!그 부인님 참 복받은 분이시네요.
    행복하세요!

  • 6. mmsina
    '10.5.10 1:12 PM

    제 딸도 고2 예요.
    우리 남편에겐 절대 바랄 수 없는 일을 하셨네요.
    부러워라...

  • 7. 맥주짱
    '10.5.10 6:26 PM

    고3인 울 딸도 아침밥과 잠보다는 머리치장이 더 중요.......아침은 서서 먹으면서 그 긴 머리를 매일감고 드라이에 고데기까지.....뒷통수째려보며 가슴을 치지요...ㅎㅎ 일요일 아침만은 신랑이 책임져 줬으면.......

  • 8. *miYa*
    '10.5.10 10:38 PM

    처음 올리셨던 게시글(청국장관련)읽고 가슴이 울컥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여자분이신줄 알았는데 남자분이셨네요.^^

  • 9. whitecat
    '10.5.11 1:58 AM

    큰 충격 받고 갑니다.
    월요일 아침...으로 올리신 게시물에 발동이 걸려
    첫 게시물부터 검색해서 읽고는
    아, 이 분은 자취하는 젊은 처자로구나(나보단 좀 언니 같고, 골드미스일 거야)라고
    나름 근거 있는(?) 결론을 내렸었는데

    고등학생 딸이 있는!
    아빠시라니!

    아, 충격... _(__)_ 저 내일까지 못 일어날 것 같아요 ㅎㅎ

  • 10. 하늘사랑
    '10.5.11 4:29 PM

    저도 충격...자취하는 미스로 생각했었건만...

    음..전...따님 나이 때에...밥이 더 중요했었는데..^^;;;

    밥 안 먹으면 학교 못간다는 엄마 덕분에^^;;;
    (울 엄마...공부하란 말씀은 안하시는데...밥 안먹으면 큰일 나는 분이셔서^^;;;;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건데~ 단골 멘트)

    지금도...하루 세끼..꼬박 챙겨 먹고 맞벌이 하는 중입니다^^

    밥심으로 살자!!!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31801 평범한 5월의 음식들..^^ 12 앤드 2010.05.13 12,155 149
31800 장미가 피기 시작한 5월의 식사모임 38 miki 2010.05.13 13,441 159
31799 도Nas (만드는 법도 적었찌요) 17 조아요 2010.05.13 6,632 157
31798 5월 요리라고 머 특별한건 없고...^^;; 49 순덕이엄마 2010.05.12 25,762 0
31797 딸의 생애 첫 소풍 - 엄마 도시락. :) 11 milksoap 2010.05.12 13,044 107
31796 신랑 간식먹이기3 13 마뜨료쉬까 2010.05.12 13,907 181
31795 얼렁뚱땅 매실식초 만들기 12 Blue 2010.05.12 32,902 168
31794 두부두루치기 11 오후에 2010.05.12 9,640 239
31793 Banana Crumb Muffins 3 julie K 2010.05.12 4,340 152
31792 맨하탄 려관식당에서 있었던 저녁모임.. ^^;; - >').. 29 부관훼리 2010.05.12 12,159 135
31791 각자의 취향을 살려... 삼인삼색도시락 32 언제나웃음 2010.05.12 21,117 177
31790 사랑해 48 ~^^ 케잌 사랑 *^^* 3 보니타 2010.05.12 4,312 202
31789 유부초밥 샐러드 14 프로방스 2010.05.11 8,525 160
31788 46♡폐백이바지- 봉치떡과 대추고임 그리고 하트품은 풍선초씨앗 6 푸른두이파리 2010.05.11 7,459 212
31787 귀차니스트를 위한 오븐 불닭 49 추억만이 2010.05.11 9,196 180
31786 통밀 베이글 15 Lydia 2010.05.11 6,383 169
31785 안녕하세요. 메주띄우기와 된장(막장)담기 이벤트 공지합니다. 22 국제백수 2010.05.11 6,026 191
31784 꾸물한 날씨에 무청국장찌개 11 경빈마마 2010.05.11 8,257 153
31783 사랑해 45 ♡♥ 1 열~무 2010.05.11 3,395 179
31782 사랑해 44 ♡_♡ 6 사랑화 2010.05.11 4,519 175
31781 사랑해 43~ 7 birome 2010.05.11 4,091 130
31780 네모군 때문에 한판더 굽게된 Elvis Presley's Fav.. 3 June 2010.05.10 8,742 288
31779 상큼 발랄하고 달콤한 블루베리 파운드케이크 3 June 2010.05.10 5,393 295
31778 LadyFinger를 이용해서 베이킹이 필요없는 초~초간단!! .. 4 June 2010.05.10 5,860 278
31777 내가 만든 내생일 케잌 4 예다 2010.05.10 6,032 192
31776 밥, 일요일 아침 10 오후에 2010.05.10 12,244 274
31775 남편과 딸이 준비한 Happy Mother's Day!- 10 에스더 2010.05.10 16,363 206
31774 선생님 도시락.. 11 유니게 2010.05.10 16,204 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