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는 부엌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물 끓고 간장 졸아드는 불 가까이 있으면 훈훈하고, 음식 냄새 섞여 뿌옇게 김이 서린 유리창은 집안에 안온함을 더해줍니다. 환하게 등 밝힌 부엌에서 서로 속도 맞추어가며 밥술을 뜨고 있자면, 제가 차린 조촐한 것들에도 초겨울 분위기가 그럴싸하게 감돌곤 합니다. 그렇죠. 착각이야 늘 제 마음대로이지요. ^^
늦여름부터 지난 달까지 아이가 아침에 먹은 것 찍어 둔 사진을 올려 봅니다.
J 녀석 머리엔 아침 식사란 '밥이 아닌 다른 먹을 거' 아마 이렇게 대분류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가 말하자면 '서양식 아침'을 차려 주었으니까요. 그러니 녀석에겐 제가 가진 기억 같은 거...무거운 이불로 산을 만들어 놓고 자는데 부엌을 타고 넘어오는 칼질 소리가 있어 선잠 깨어 일어난다던가, 방금 끓었다 내려앉은 북어국이나 쑥국이 뿜어내는 허연 김을 불어가며 밥에 첫 수저를 꽂던 겨울 아침 밥상머리의 기억 같은 건 없을 테지요.
아이가 먹는 아침은 간단합니다. 샌드위치에 과일을 곁들여 우유와 먹는 게 기본이자 대부분입니다. 그때그때 과일과 샌드위치 종류가 달라지기는 하지만요. 그릇도 단순반복입니다. 저는 이사 오기 전부터 아이 그릇으로는 IKEA 그릇을 썼습니다. 값싸고, 희거나 환하고, 모양이 단순해서 두루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런 것이나

이런 것들요.
제가 아침은 차려 주긴 하지만, 늦잠 자서 급할 때가 아니면 J 는 최소한 한 두 공정^^을 도와야 합니다. 엄마도 아빠처럼 아침 일찍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당연히 도와야지요.
파일명이 날짜순이길래 적어 봤는데 가만 보니 사진 찍은 날이 아니라 옮긴 날 같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8월 21일
이 날은 똑 떨어진 줄 알았던 바질 페스토 한 병을 찾아내서 기쁜 마음에 곡물 빵에 듬뿍 발라 모짜렐라 치즈를 넣어 구워서 grilled cheese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9월 29일
사진만 봐서는 정확히 뭘 해 주었는지 모르겠네요. 비죽 나온 풀을 봐서는^^;; 전날 만든 샐러드 남은 것을 넣고, 발사믹 식초에 졸인 닭고기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탄 빵의 자태하며 자르지도 않고 통째로 담은 솜씨를 보니 녀석이 도맡아 차린 아침 같습니다.

8월 31일
이날은 참치 샌드위치입니다. 이 며칠 전, 고추장에 묻힌 것 말고 매실즙 내고 남은 매실로 담근 장아찌를 얻었습니다. 언제 다 먹나 싶어 궁리하다가 그 매실 과육을 쫑쫑 다져서 피클처럼 섞어 봤더니 기대 이상의 효과를 냈습니다. 살짝 쌉싸름하고 은근히 시큼한 것이, 독한 산에 절여 만든 불명의 피클을 넣을 때보다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었고요. 이 무렵 아마도 다이소라는 곳에서 쟁반을 하나 샀지 싶습니다. 오천원인가 했는데 튼튼하고 모양도 좋아서 매일매일 잘 쓰고 있습니다.

9월 7일
이날은 에그 샌드위치입니다. 만들다 보니 속이 좀 많았는데, 아까워서 다 밀어 넣었더니 빵 볼이 터지려고 하네요.^^;; 요 무렵 아오리 사과 맛이 좋았습니다. 매일매일 몇 알씩 사다가 먹었는데...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전 아직도 몇 봉다리씩 매일 조금씩 사다 먹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장보기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사다 두고 먹으면 편하고 급할 때 요긴한 줄 모르지도 않으면서 습관 고치기는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9월 22일
이날은 시간이 없어서, 과일만 씻어 담아 주고 머리 감는 동안 계란 몇 개 삶아서 아이 주고 저 먹고 튀어 나온 것 같습니다. 남편은 새벽 일찍 일어나서 전날의 설거지를 해주고, 저녁 먹을 때 덜어 둔 국과 반찬을 챙겨 먹곤 합니다. 속이 좋지 못할 때, 어머니 와 계실 때 그런 때만 아니면 남편 아침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스럽습니다.

9월 23일
이날은 누텔라와 땅콩잼, 그리고 과일인데, 다시 봐도 허전해 보입니다. 이런 기분으로 나오는 날에는 저녁을 좀 더 신경 써서 고루고루 차려 먹이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늦게 잠드는 날은 아이에게 메모를 남겨 둡니다. 무엇무엇을 꺼내서 어떻게 저떻게 차려 먹어라. 남편에게도 같은 메모를 남겨 줍니다. 그러면 남편 지시하에^^ J가 차려 먹고 갑니다. 그래야 하는 날에는 저렇게 미리 빈 접시를 차려 두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그 때가 아닙니다만.

9월 24일
이 날은 전날 열 마리에 오천 팔백원하던 새우를 사서 몇 마리 남겨 두었다가, 삶아서 새로 한 밥에 넣고 참기름 두르고 멸치 다져 넣고 김 부수어 뿌려서 동글밥을 만들어 준 날입니다. 어릴 때부터 잘 먹었고, 아침에 주어도 절대 마다 않고 먹는 겁니다.

10월 4일
빵의 신선도가 신통치 않아 보이면 계란 풀고 우유를 섞어 적셔서 팬에 구워 시나몬 슈가를 뿌려 줍니다. 이 날은 아무래도 모자라겠다 싶어서(이사 와 보니 식빵이라 하는 흰빵 볼 때마다 '에게게 작아라' 싶습니다^^) 한 쪽 더 구워 주었습니다.


10월 5일
보통 일곱시 십 오분에서 삼십분 쯤 나가는데, 이날은 모조리 봉지와 통째로 주었네요. 제가 늦잠을 잤거나 바쁜 날이었나 봅니다. 알아서 먹고 갔겠죠. ^^;;;

이건 단감 남은 것이 있길래 저미듯 썰어서 사과랑 한 겹씩 (마구) 쌓은 뒤에 매실즙을 한 바퀴 둘러 내 준 겁니다. 샐러드 드레싱이란 게 거기서 거기일 때가 있는데, 가끔 이렇게 맑게 뿌려 주면 산뜻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손님 차림 아니고서는 샐러드 드레싱도 거의 안 씁니다. 생 채소 그대로 먹으라고 권하는 편이에요.

10월 6일
베이글하고 크림치즈를 준 것 같은데, 통 기억이 없네요. 그건 그렇지만, 대형 마트에서 묶음으로 파는 떠먹는 요거트 샀다가 아이나 남편 모두 썩 좋아하며 먹지 않길래 저렇게 아침저녁으로 안 먹으면 안 되도록 해서 준 기억은 아주 자알 납니다. J가 이게 무슨 드레싱이냐고, 이거는 요거트라고, 왜 떠먹는 요거트를 과일하고 섞어 주냐고 투덜거렸지만, 오로지 남은 요거트 갯수에만 신경이 갔던 저는 그쯤이야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10월 8일
이사 오기 전에는 한 주에 두 번 정도 시리얼을 먹었는데, 여기서는 순곡물 시리얼을 보지 못했고, 있어도 비싸서 아침 생각할 때 빼 버렸습니다. 이 날은 어느 댁에 놀러갔다가 한 주먹 얻어온 시리얼이 있어서 그걸 먹으라고 내 주었습니다. 무슨 반가운 친구 만난듯 얼굴 환해지던 J 보면서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날도...
곡물 빵에 계란을 입혀 구워 주었는데,
'곡물빵은 샌드위치 하면 좋고 이건 하얀빵으로 하면 좋은데...' 볼멘 소리를 내던 J에게
알았다고, 다음부턴 그렇게 해 줄 테니 오늘은 얌전히 먹으라고 은근히 협박하던 제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그뿐이 아니고,
보아라. 아무리 바빠도 과일 한쪽씩은 꼭 함께 먹어야 한다. 유세도 떨었군요.

BLT 에 C 가 더해진, 고로 베이컨 토마토 상추 치즈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입니다.
바빠서 과일 깎는 걸 까먹거나 빼먹을 것 같아서 저렇게 올려 놓고 아이더러 씻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밑의 샌드위치는 8월 것인데, 모양을 보니 J가 만들었나 봅니다.
꾹 누르면 터진다고 잔소리 하는 건 녀석,
빵이 이불이냐? 눌러. 눌러도 된다니까. 질질 흐르는 것보다 낫지! 하는 쪽이 저이니까요. ^^


어디서 아주 맛있는 고구마가 굴러 들어왔습니다. 저희는 아침 식사로 고구마를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엔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두 사람 반응이 좋아서 요즘은 일주에 한 번 정도는 아침 먹으라고 줍니다.

저녁 차린 사진도 몇 장 있네요. 저녁은....퇴근하고 돌아와 지친 상태에서 밥하고 차리는 상이다 보니,
뭘 찍고 어쩌고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이삿짐도 다 풀리지 않은 상황이어서
식탁도 없고, 식탁보도 마음에 드는 것을 구하지 못하고 더 엉망이었죠.
이 날은 무슨 날인지? 아무 날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찍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치가 있고, 생 채소와 무침이 있고(미역 무침 같기도 하고..), 김이 있고,
생선 구이가 있고, 아이가 좋아하는 감자 전이 있고, 찌개가 있고 그렇습니다.
저희 수준에서는 준수한 밥상입니다.

이 날은 비빔국수랑 만두인 것 같은데, 반찬을 다 꺼내지 않고 찍은 것 같습니다.
면으로 차렸으니 뭐 더 내 놓은 것도 없었겠지만요.
제가 싫어해서라도 불어터진 면을 내 놓은 적은 거의 없는데
사진 속의 비빔국수는 퉁퉁 불어터진 것처럼 보이네요.
식탁보를 사긴 사야겠다고 이 사진 보면서 맘먹은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이쯤 차려 놓고 아이를 부릅니다.
J 야 십 분 있으면 밥 먹을 거야. 나와서 상 차려.

그러면 J가 나와서 수저 챙기고 밥그릇 챙기고 김치 꺼내고 과일 꺼내고 그런 정도를 도와 줍니다.
과일을 식후에 먹을 건지 샐러드처럼 먹을 건지 물어 보고, 함께 먹겠다고 하면 옮겨 닮아 줍니다.
이날도 그때처럼 묶음으로 사 온 요거트 처분하느라 저렇게 어색한 반찬이 되어 어울려 있습니다.
(이날 이후 그 층층 요거트 묶음은 저희 집 장바구니에서 아웃되었습니다^^;;;;;)

보아하니 이것도 밥상 완성 전에 찍었네요. 이건 사진 자체도 녀석이 찍은 것 같습니다.
먹기 싫으니까 오이 절인 건 조오금, 먹고 싶으니까 으깬 감자는 산을 쌓아놨네요.
(아직은 훈련이 덜 되어서^^;; 설거지나 쓰레기 정리 버리기에 비해 요리는
계란 후라이, 라면 끓이기, 밥하기 정도 밖에는 할 줄 모릅니다. )
굳이 올리지 않아도 되는데 계란 먹고 싶으니까 부쳐서 올려 놓고...
이날 드럼스틱이라고 부르는 닭다리가 겨우 저만큼,
다섯 개 남짓인데 6천원 가까이 했던가 넘었던가 해서
살 때 물가가 참 비싸구나...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건 간식입니다. 후추처럼 보이지만 말린 허브와 구운 마늘 부수어 뿌린 겁니다.
마늘에 구운 마늘을 부셔서 뿌리면 아주 맛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이때 엄마 근데 왜 머스터드를 여기다 놨어? 소릴 들었습니다.
이게...그냥 먹지 말이 많냐, 속으로는 꽥, 했지만
겉으로는 어서 먹으렴~ 하고 온화하게 웃어주었습니다.

지난 추석에 남산 공원 산책 갔다가 J가 찍은 장미를 입가심하시라고 보여드립니다.
녀석은 케이블 카를 타고 싶어했는데, 그날 바람이 급히 불기도 했고 세기도 했습니다.
모시고 간 어머니께서 몸이 쓸쓸하신 듯하여 다음에 또 오자고 하고 그냥 왔습니다.
장미가 둘도 있고 셋도 있는데, 왜 또 꼭 홀로인 걸 찍니.
아이가 보여주는 화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대로 삼켰습니다.
꽃은 꽃이요, J는 J일 뿐, 녀석은 그냥 핸드폰을 갖고 놀았을 뿐인지도 모르니까...

8월부터 10월까지니까 무려 석 달인데, 이렇게 하니까 아주 간단하네요. ^^
그리고 이건 지난 번 글 올리고 난 다음 날이던가....J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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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한국 사람들은 좀 이상한 것 같애.
또 또. 한국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았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좀 이상한 것 같애.
뭐가.
약을 파스타라고 그래.
뭐?
제가 있던 방으로 건너온 녀석이 쓱 내민 건 약 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그걸 보면서도 뭐가 이상타는 건지 퍼뜩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다분히 건성으로 뭔데에, 하며 채근하던 제게
J 녀석은 여전히 말 없이 약 통 앞뒤를 손가락으로 슥슥 밀어가며 가리킵니다.
잉, 이거 뭐야. 아비나 파스타????
웃기지.
아니 이거 페이스트를 파스타라고 한 거네?
그게 내 말이야.
히히 J야 이거 진챠 웃기다.
응. 웃겨.
진짜 이거 모르고 그랬을까? 아니 왜 페이스트를 파스타라고 했대?
(J 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미쿡 넘처럼 양 어깨를 삐쭉)
여보, 이것 좀 봐봐~으하하 이거 웃겨~



아이고 시간이 많이 갔네요. 저는 이만 들어가야겠습니다. 밥 해야죠.^^
오늘 저녁도 따뜻하게 맛있게 식사하시고, 남은 시간 마무리 잘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