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는 아무래도 길담 불어수업이 있어서 그 준비로 마음이 바빠서 줄을 바꾸러 나가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오늘 생각난 김에 제게 바이올린 배울 기회를 제공한 권 성연씨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그녀가 소개할 만한 악기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요.
그랬더니 잠깐 기다려 보라고, 토요일에 함께 가면 아무래도 얼굴을 아는 악기점 사장님이 도미넌트 (줄을
그렇게 부르더군요) 를 깍아 줄 것 같으니 오늘은 그냥 쇠줄로 이어서 연습해보면 어떤가 하고 권했습니다.
가는 방법도 모르고 쇠줄도 없다고 하니 성저 초등학교 근처로 오라고 하네요. 일단 본인이 갖고
있는 줄을 빌려주겠노라고.

사무실에 취직하는 바람에 함께 하던 공부 모임에서 만날 수 없게 되었지만 바이올린 선생님이 같은
분이다 보니 레슨 시간에 들고 나면서 가끔 얼굴을 보곤 합니다. 그래도 폐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해했더니
그녀 왈 폐를 끼치고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 아닌가요?
하긴 그렇구나 싶어서 그렇다면 그 곳으로 가겠다고 대답하곤 미리 가서 오랫만에 두 아이들이 졸업한
학교 성저 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두 명씩 짝을 이루어서 폴리스 활동을 한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그녀가 취직한 곳이 폴리라는 영어 학원인가 했더니 두 여성이 똑 같이 노란 유니폼을
입고 있더군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주변을 돌면서 혹시 밖에서 방황하고 있는 아이들은 없는가
점검하고 다닌다고요. 그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바이올린 줄을 갈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오늘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왕 밖으로 나온 길에 세탁기안의 먼지 제거 망을 사려고 대화동으로 가는 길, 이미 길에는 가을이
한창이네요. 멀리 갈 수 없는 제겐 길거리의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느끼는 시간이 되어서
걷는 일이 즐겁더군요. 더구나 새로운 꽃들도 몇가지 발견했고요.



묘한 자리에 핀 꽃을 제대로 찍어보고 싶어서 이리 저리 자리를 바꾸면서 씨름하던 시간이 생각나네요.
성저마을에서 대화동까지 걸어가는 길에 만난 풍경입니다.

막상 가전제품을 파는 매장에 가니 부품은 그 곳에서 취급하지 않는다고요. 다시 소개받은 곳으로 버스타고
나가는 번거로운 일이 남았지만 이왕 나선 길, 이왕이면 즐겁게 가자고 마음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일상을 면제받고 살아왔던가 갑자기 마음에 확 와 닿는
느낌이 강렬하더군요. 낮 시간 그녀의 말과 겹쳐져서 오는 깨달음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선뜻 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어디서 나오는 힘일까?
나는 시간에 참 인색한 사람인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상하게 오랫동안 오늘의 이 시간을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