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서 톡 프랑스어 책안에 아비뇽에는 무슨 볼 것이 있나요?란 제목의 장이 있어요.
오늘은 아직 거기까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도 일부러 그 장을 틀어놓고 듣고 있는 중인데요
한국인 진행자가 프랑스인 진행자에게 아비뇽에 가 본 적이 있는가 물어보니 아직 가 본 적은 없으나
아비뇽 다리에 관한 노래가 있다고 하면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으로 시작을 하네요.
아비뇽유수란 말로 세계사 책에서 처음 만난 아비뇽은 늘 그렇게 제겐 역사적인 장소,그래서 자동적으로
로마로 돌아가기 전까지 교황들이 거처했던 오래 된 장소로만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29일 퐁뒤가르를 떠나서 그 다음 간 곳이 바로 아비뇽인데 그동안 보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다 들
배가 고픈 것도 참고 있던 중이라 아비뇽에 도착하기 전에는 아직 구하지 못한 그 날 잘 곳과
먹을 곳을 찾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일단 책에서 찾은 번호로 연락하여 방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찾아간 호텔 미뇽에서 무료주차장을 소개받아
차를 주차한 다음 음식점을 찾아다녔지요.

성벽으로 시가지 안과 밖이 나뉘는 모양입니다.사실 이런 식의 성벽은 이 곳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날이 별로 춥지 않아서인지 밖에서 식사와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네요.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더니 이 곳과 안에서 식사가능한 이 식당이 같은 집이라고요.

안에 들어가니 무지개색으로 걸린 표식이 이 곳은 게이들에게 우호적인 레스토랑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마레지구에 대한 이야기가 덩덜아 나오고,이 곳에서 일하는 젊은 남자들이 미남들이라고 이야기가
만발합니다.보람이는 밤에 오면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하다고 해서 웃기도 했는데요,아무래도 외국에서 공부하다
보니 게이인 친구도 생기고,그들의 삶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이해도 넓어져서 그런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상당히 마음이 열려가고 있다는 것이 이번에 본 아이의 변화라고 할까요?

교황궁이 아무리 근처에 있어도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으면서 이야기가 흘러넘칩니다.
드디어 늦은 점심이 끝나고 교황궁을 찾아나섰습니다.

시간이 늦어서 교황궁과 아비뇽 다리 두 가지 다 보려면 서둘러야 하는 상황,표를 구하면서 보니 영어로
설명하는 기기를 무료로 대여해주고 있네요.그것을 받아서 들어갔습니다.내부는 사진찍기 금지로군요.

로마에 있던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기게 된 사연에는 보니파키우스 8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4세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요.
이런 갈등의 발단은 사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에서 비롯된 것인데 전쟁 비용이 모자라던 두 나라 왕은
자국의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이것이 결국 교황의 심기를 건드려서 교황의 승인없이 세금을 부과하면
파문에 처하겠다는 칙서를 보니파키우스8세가 발표했다고 합니다.
영국은 이에 순응했지만 프랑스는 이에 반발해서 프랑스와 교황사이에 긴장이 촉발되었으나 교황이
필리프4세의 할아버지 루이9세를 성인으로 추증하면서 긴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우리가 생루이라고 알고 있는 십자군전쟁에 출정했던 사람인데요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십자군 전쟁 출정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반면 교황의 파문을
견뎌야 했던 프리드리히는 오히려 십자군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평화를 이루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긴장완화로 상황이 해결된 것이 아니고 봉합에 불과했는데 ,프랑스 왕이 베르나르도 주교를
반역죄로 고발하여 투옥을 한 뒤 교황대신 자신이 자국 주교들에게 사법권을 행사한다고 선포함으로써
긴장은 완전히 폭발하고 말더군요.
교황은 당연히 교황청의 수위권을 재확인하는 칙서를 발표했고 프랑스 왕은 이에 맞서서 삼부회를 소집하는데요
우리가 아는 프랑스 혁명기에 소집된 삼부회는 사실은 여기서 처음 시작된 것이라고요.
물론 이 때의 삼부회는 왕이 소집한 것이므로 우리가 아는 왕권에 대항하는 그런 모임이 아니고 오히려
왕을 보조하는 기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에 교황은 유일한 거룩이란 칙서,중세의 교황청 문서중에서 가장 유명한 문서를 발표했는데
그리스도가 베드로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영적 권한과 더불어 세속적 권한도 주었다고 선언했을뿐만
아니라 교황의 권능에 복종하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못박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네요.
교황은 이렇게까지 하면 왕이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왕에게는 기욤 드 노가레라는 고문이 있었는데
그가 왕에게 교황을 공격하라고 부추겼고 왕과 교황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요.
노가레는 교황에게 가서 자진 사퇴를 촉구했지만 교황은 거절했고 함께 간 사람이 교황의 뺨을 때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이런 상황에서 교황을 죽이자는 사람과 아니다 교황을 프랑스로 데려가서
공의회를 열어 교황을 폐위시키자 이렇게 실랑이가 벌어지는 와중에 아니니 시민들이 교황을 구출해서
그가 무사히 로마로 돌아갔지만 충격으로 인해 곧 사망하고 말았다고 하네요.
이 사건으로 전 유럽은 충격에 빠졌고 스위스의 한 주교가 프랑스의 왕과 그 아들들에게 재앙이 생겨서
프랑스 왕위를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프랑스 왕도 그 해에 죽고 아들들도 차례로 죽는 바람에
카페 왕조의 대가 끊어져서 프랑스 왕위는 발루아왕조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하지요.

후임 교황 베네딕토 11세가 프랑스 왕에게 사면을 베풀어야 할 만큼 프랑스 왕의 힘이 상당했다고 하는데
베네딕토 11세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친프랑스파 반프랑스파로 나뉘어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교황선거는
결국 친프랑스파인 클레멘스 5세가 이겨서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이것을 프랑스의 힘이 강해서 프랑스로 교황청을 옮겼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리치의 지중해문명사를 읽다보니 당시 아비뇽은 우리가 아는 프랑스땅이 아니었더군요.
프랑스가 지금의 프랑스 영토를 다 자기 영역으로 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라고요.
그러니 교황이 과연 프랑스 왕의 휘하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제기를 읽다보니
그렇네,그렇다면 왜 그렇게 단정적으로 많은 역사책들은 기술하고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서 노리치의 견해를 다른 사료없이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이런 혼란을 느끼던 중에 아비뇽에 가게 되었고 덕분에 평소라면 구해서 읽지 않았을 교황의 역사라는
책도 구해서 읽게 되었는데요 그렇다고 의문이 다 확실하게 풀린 것은 아니네요.

클레멘스 5세부터 시작하여 교황이 총 7명이 이곳에서 살면서 교황궁을 넓히고 그 안에서 지금의 바티칸처럼
교황과 추기경,사무직원들을 포함하여 교황청을 돕는 사람들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만들어나가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교황들은 로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을 테니 일종의
피난살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등도 이 곳에 와서 비서로 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교황청이 이 곳에
옮겨짐으로써 아비뇽은 그 이전과는 다른 문화적인 충격과 영향을 받았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