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
"응, 수요일날 면접 보러가서..."
"그럼, 사줘야지"
바지 정장 덜렁 한벌 있는 거, 지난 번 가면접 보러갈 때 입었으니, 다른 옷을 입어야할텐데, 어디 정장이 있어야 말이죠.

오늘 데리고 동대문엘 갔습니다.
어떤 정장을 고를까, 평소처럼 좀 특이한 옷을 고르나 하고 두고 보니, 가장 평범한, 직장여성들의 제복같은, 아무런 디테일도 없는 블레이저 재킷에 H라인 스커트만 찾네요.
동대문을 몇바퀴 돌아도, 적당한 건 단 한벌 밖에 없어서, 그걸 샀어요. 아이는 짙은 감색을 사고 싶어했는데 아쉬운 대로 짙은 갈색의 울 소재 수트를 샀죠.다소 두꺼운 듯했지만.
그리곤 흰셔츠도 한장 사고, 여름 원피스 한장 사고....그랬는데 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요.
"왜?"
"이제 계속 입어야 하는데 좀 두껍지 않나?"
"얇은 옷 사러 백화점으로 갈거야, 여긴 적당한 게 없어서..."
그제서야 딸아이 얼굴이 펴지대요.
롯데백화점 본점 2층에서 한바퀴 도는데, 아이가 찾는 옷은 없어요. 3층으로 올라가니 찾는 옷이 있긴 한데 입혀보니 엄마옷 빌려입은 듯한, 혹은 교복을 입은 듯한...,지극히 평범한 재킷에 더욱더 평범한 스커트...
회색 투피스를 입어보는 딸아이를 보는데, 왜 그리 속이 아리고, 왜 그리 콧등이 시큰해지는지...
데리고 다니면서 자꾸 얼굴 쳐다보고, 손 만져보고, 팔뚝도 만져보고 하니까, 딸 아이는 "왜애~~" 합니다. 엄마 속도 모르고...
1981년 6월16일 새벽, 딸 아이를 낳아놓고 참 많이 울었어요.
친정어머니는 울지말라고, 붓는다고, 부으면 부기 잘 안빠진다고 말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었죠.
아들이 아니어서 서운했냐고요?
아니요, 여자가 살아가기에 너무 척박한 이 땅에, 아이를 내던져 놓은 미안함 때문에 많이 울었어요.
그 아이가 여태까지 잘 커줘서, 한번도 크게 아픈 적 없고, 한번도 공부 가지고 속썩인 적도 없고,
한번도 학교생활에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그만하면 효녀죠.
제 친구들 모두 제딸처럼 자기딸들을 키우고 싶어해요.
그 딸아이가 이제 취직을 하려고 한다네요.
모 그룹회사에 원서 내고, 가면접 보고, 상식시험 보고, 드디어 내일 5시간동안 시험과 면접을 본다고 하네요.
이 아이가 이제 사회에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는데, 제 맘이 왜 이리 착찹한지...
얘가 이제, 제가 살았던 것 처럼 그렇게 살려고 하네요.
'여자니까' '여자라서' 소리 안들으려고 기쓰고 일하고, 죽어라 일하지만 승진이니 보직 문제에 차별받으면 좌절하고, 그러다 다시 이를 악물고 일하고...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주 짠해와요.
정글의 법칙이 통하는 사회에 던져지는 여리디여린 꽃같은 내 딸...
엄마 욕심같아서는 좀더 공부해서 승진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을 일해줬으면 하는데, 차별없이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해줬으면 하는데, 사자들이 좀 적은 그런 환경에서 일해줬으면 하는데...딸아이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에요.
어디 그뿐인가요? 지금이야 결혼 안한다고 하지만, 결혼까지 하고 나면...
갓난아이때부터 먹성이 좋아 보통 아이들보다 두배는 많이 먹고 콩나물 자라듯 쑥쑥 자라주던 아이.
만 세살도 안된 것이 파마하고 싶다고 해서 미장원에 데려갔더니 파마풀 때까지 단 한번도 칭얼거리지 않고 꾹 참고 예뻐지기만을 기다리던 아이.
유치원 통학차를 기다리면서 "엄마 이거 어제 배운 거야"하면서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아이.
엄마가 코미디 프로그램 좋아한다고, 엄마앞에서 '시커먼스 좋아요, 좋아요' '아 아 아르바이트' 이런 코미디를 흉내 내주던 아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퇴근해서 들어가 야단치니까 "엄마 회사에서 돌아오면 즐겁게 해주고 싶은데 엄마가 화내서 내 속이 너무 상해"하며 엉엉 울던 아이.
여자가 되던 날, 동네 금은방에 데리고 가서 작은 진주펜던트를 하나 사서 갖고있던 14K금줄에 걸어주니 얼떨떨해하면서도 좋아하던 아이.
초등학교 졸업후, 그리고 중학교 졸업후 엄마랑 단둘만의 여행이 이상했던지, 아기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던 딸 아이.
아직도 아기 때 통통했던 다리의 질감이며, 안았을 때 팔에 전해지던 무게며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젖병을 빨던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데 이제 바람처럼, 바람처럼 제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해요.
기뻐해야겠죠, 사회인이 되는 걸? 그런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 왜 이렇게 가슴이 저린 지 저도 모르겠어요.
제 딸아이도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겠죠? 제가 20여년동안 벼텼듯...꿋꿋하게 버티겠죠?
p.s.
사진은 자스민입니다.
보라색꽃이 피었다가 며칠 뒤면 하얗게 꽃색깔이 변합니다. 꽃을 다 피우고 나면 새들새들 말라버립니다.
말라죽었나 싶으면 그 다음해 봄, 생기를 차리면서 새잎이 돋고 또 저렇게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저희집에서 4년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