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전 지금도 요리를 무서워하고 음식하기 싫어하는 여자였을 겁니다.
만약에 제 친정어머니가 요리솜씨가 없는 분이었다면...
아마도 제가 감히 요리책을 내는 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에 제가 고기나 생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하면서 밥해먹기'나 '칭찬받은 쉬운요리'에 더욱 다양한 채소음식이 실렸을 겁니다.
만약에 우리 가족들이 밑반찬을 좋아했더라면...
아마도 주말이면 일주일 동안 먹을 밑반찬 준비로 분주한 대신 평소 밥상은 좀 쉽게 차렸을 겁니다.

토요일 아침 kimys랑 이마트엘 갔었어요.
정말 먹을 게 단 한개도 없었거든요. 감자 한톨, 호박 한조각, 풋고추 한개가 없는, 완전히 냉장고가 거덜난 상태였어요.
식품매장을 여기저기 샅샅이 둘러보는데...
참 CJ는 대단한 회사더군요.
냉장쇼케이스 안에 햇찬이라는 이름으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살펴보니 벼라별 게 다 있어요.
햇반의 반찬이라며, 콩자반이니 메추리알조림 돼지장조림 쇠고기장조림 우엉채조림 같은 조림류의 밑반찬에서부터 고등어김치조림 삼치구이같은 메인디시로 손색이 없을 듯한 생선반찬들, 그리고 무말랭이무침이나 진미채무침 등등 반찬 등을 아주 깜찍한 용기에 담아 소포장으로 내놓았더군요.
정말 햇반과 그 햇찬만 있으면 요리가 필요없겠더라구요.
헛, 그거 참...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 보셨으면, "여자들 살기 참 좋은 세상이다"하셨을 것 같아요.
햇찬을 보고 나니, 저도 좀 밑반찬을 만들어야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우리 식구들은 졸임류나 젓갈류(명란젓만 빼고)의 밑반찬 잘 안먹어요.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같은 거 해봐야 워낙 잘 안먹으니까 저 혼자 먹다먹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버리는 일도 왕왕 있죠. 그래서 여간해서는 안해요.
그런데 오늘은 좀 해둬야겠다 싶더라구요.
먹거나 안먹거나 간에 밑반찬이 있으면, 김치 다섯가지로만 상을 차리는 그런 만행은 저지르지 않을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까놓은 메추리알 한봉지 사고 (이유는 아시죠? 왜 까놓은 걸 사는지), 마늘종도 한다발 사고, 연근도 한 팩 샀어요. 일단 생각나는 것이 그 정도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하기 전에 하나하나 해결을 봤죠.
일단 작년 여름 만들어 모밀국수용보다는 반찬용으로 많이 쓴 모밀간장을 꺼냈어요. 거의 다 먹어가 모밀간장에 맛간장을 섞은 후 물 좀 타고, 물엿을 섞어서 조림장을 만든 다음 메추리알부터 조렸죠.
그 옆에 식초를 탄 물을 끓여 연근을 데친 후 같은 방법으로 조리고...
또 소금탄 물을 끓여 마늘쫑을 데친 후 고추장과 물엿, 참기름 통깨 넣어 무치고...
순식간에 이렇게 세가지 밑반찬이 완성됐어요. 락앤락 모델 답게 락앤락통에 담아놓고 보니 얼마나 든든한지....
이럴 때 제가 잘 하는 말, '밥 안먹어도 배 부르죠!!'
이거 말고도 냉동고에서 멸치와 진미채를 찾아서 멸치볶음과 진미채무침도 할 거에요.
그리고 조림의 맛을 몇배 좋게 해주는 모밀간장도 만들어 두려구요.
그럼 며칠동안은 한결 식사준비가 편하겠죠? 밑반찬 만들어 두는 건 좋은데 밀린 원고 다 언제 쓰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