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오바마 연설문 공부를 마무리 하는 날, 오늘은 지혜나무님 집에서 수업이 있다고 해서
동네인지라 카메라 들고 걸어가는 길, 화요일 하루의 황망했던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거짓말처럼 열이 떨어져
새벽에 일어나 회사에 가는 보람이, 그리고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노라고 일하러 가는 승태를 배웅하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제 마음도 가볍습니다.

카메라의 접사 기능과 줌 기능, 그리고 A모드에 놓고 찍는 기능도 배운지라 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나
두리번 거리게 되지만 겨울의 초입이라 그런지 스산한 날씨에 눈길을 끄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도 주의해서 보니 역시나 나를 돌아보라고 손짓하는 듯한 초록이 여기 저기 숨어 있습니다.



더 지체하면 늦을 것 같아서 카메라를 집어 넣고 처음 가는 아파트를 찾아갑니다,지난 금요일, 아들의 성적때문에
혼비백산한 심정을 추스릴 수 있게 된 날이라서 마리포사님, 호수님과 더불어 점심을 먹고는 구두를 사러
갔었지요. 사실 쇼핑하면 처음 눈에 드는 것 골라서 바로 나와버리는 제겐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대신
경제적인 면을 꼼꼼히 고려하거나 오래 쓸 수 있다거나 서로 맞추어서 신거나 입는 그런 센스가 모자란 편인데
두 사람과 함께 한 쇼핑은 시간은 걸렸지만 제겐 내 스타일이라고 밀고 가던 그런 것들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기회가 된 셈인데요, 오늘 처음 롱 부츠를 신고 간 셈인데 (사실 롱 부츠란 물건을 산 것도 난생 처음이지만 )
덕분에 입구가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소란이 일기도 했지요. 이런 변화, 그것이 수요일 모임이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싶네요,

미국에서 3년 사는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green thumb이란 별명으로 불렸다는 지혜나무님, 그녀의 집은
아하, 그런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팍 옵니다. 그래서 자리에 앉기 전 우선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운 장소였답니다.


마루 가득한 책, 그 중에서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나란히 늘어서 있는 철학책이었지요. 아니 부르디외와 장자가
그래서 두 권을 빌리고,

다시 시간을 내서 찬찬히 둘러보러 와야지 마음 먹었지요.

글씨는 분명히 지혜 솜씨인데 그림이 예사롭지 않아서 물어보니 바로 서예하시는 지혜 할아버지의 선물이라고요.
그림에 아이가 마음대로 글씨를 쓰게 허용하는 그녀의 아이 키우는 방식이 눈에 확 들어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집이라고 말하면 집마다의 개성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 그 집이 갖고 있는 표정이 있다는 것,그리고 그
표정이란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변하면 그 집의 표정도 변한다는 것, 그런 것을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되는군요.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멤버중 한 명인 수인씨가 우리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자스민이란 이름의 중국 음식점에 갔습니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서 각자 이 수업으로 인한 변화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했지요.
그 시간이야말로 23주의 실험이 끝난 날의 결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넘쳤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 연설문과 영어 문법, 그리고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영어본으로
한 번에 한 이야기씩 읽기로 하고, 요리교실은 월요일 운동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 나오면서 앞으로 이 사람들과 어떤 곳으로 함께 가게 되는 것일까 조금 더 기대를 하게 되는
좋은 에너지를 느낀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