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원래는 몸이 회복되면 한옥마을 모임에 갔다가 오후에는 평창동에서 열리는 전시회 하나 보고
그리고 예술의 전당에 가서 손열음의 협연으로 슈만을 듣고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들으면 하루분의
즐거움으로는 충분하겠거니 그렇게 마음을 정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금요일 아침 도저히 잠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겁니다. 아니 잠 못 잔 귀신이 다 나에게 붙었나?
눈조차 뜰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시간을 몇 시간 보내고 나니 기분이 묘하네요. 일주일 넘게 이렇게 폐인처럼
살다니, 뭔가 마음이 복잡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새벽에 읽던 마티스 책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속인지, 책이 술술 읽혀서 결국 끝까지 다 읽고 말았지요.
줄도 치지 않고 오래 간직하면서 다시 보려고 조심스럽게 (평소의 저라면 있기 어려운 태도인데) 마지막까지
읽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서 글도 잔뜩 썼는데 아차 하는 사이에 다 날라가 버려서 김이 새버렸네요.

사실 어제 연주회는 미리 표를 구해놓은 상태였는데 오드리 헵번을 닮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지인
신미선씨가 연락을 해서 그녀의 프리미엄 카드로 초청장을 두 장 받았노라고 함께 가자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녀가 받는 자리가 제가 사는 자리보다 좋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갈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싶어서 그러자고 했지만 미리 가서 좋은 자리를 배정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더군요.
그렇게 미리가서 또 기다리기엔 몸이 힘들어서 차로 쉽게 간다는 유혹을 물리치고 더 잠을 잔 다믕
그래도 아네모 모임에 못 갔는데 동네 화단에서 꽃이라도 찍어야지 싶은 모범생 컴플렉스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한 주일 동안 카메라에 손도 못 댄 것이 아쉽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조금 일찍 집을 나섰지요.

사실은 국화와 코스모스를 잔뜩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고 갔는데 이상하게 그 꽃들보다 아직도 백일홍이
많아서 아, 그래서 백일홍인가 싶더라고요.

아직도 생생한 장미 한 송이, 이리 저리 다양하게 찍어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이 한 장도 없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꽃 앞에서 느꼈던 신비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서 한 장 지우지 않고 두었습니다.


이 단지는 이상하게 언제 가도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사진을 찍는 제겐 좋은 일인지 몰라도
사람이 사는 곳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무슨 일일꼬? 더구나 놀이터는 텅비어서 놀이터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묘한 기분이 든 시간이었습니다.


한여름에 꽃이 피었던 이 나무에는 꽃이 진 자리에 까만 열매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네요. 그 모습이 신기해서
지저분해 보여도 한 장 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주변과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그런 현상에도 눈이 가는 것
그래서 사진찍을 때 저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화분에 잔뜩 심겨진 활짝 핀 국화보다 이렇게 땅에서 자란 아직 제대로 야물지 못한 국화에 눈길이 가는 것은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 주는 즐거움이겠지요?

건영빌라에서 꽃을 다 찍은 후에 쉬엄쉬엄 대화역까지 걸어가는 중 몸에서 진땀이 납니다. 전화를 걸어서
취소를 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나, 아니 그래도 귀한 연주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마음속에서 갈등이 계속 됩니다.
일단 대화역까지 가서 뜨거운 음식 하나 시켜서 먹고 상태를 보고 결정하자 그렇게 정했는데요
뜨거운 국수를 한 그릇 먹고 나니 살 만 하더군요.
덕분에 지하철에 앉아서 들고 간 최초보 프랑스어 책 한 권을 다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 이전에 어렵다고 중간에 접어두었던 부분들이 드디어!! 이해가 되는 겁니다.
물론 문장의 단어들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서 문법책을 읽을 준비는 되었구나
싶더라고요.
마음을 못 정하고 망서릴 때 몸이 말하는 대로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정해서 따라가 볼 것, 덕분에
음악소리에 행복했던 시간, 오늘 새벽부터 드디어 음악으로 하루를 여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