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혹은 세계의 역사는 거창한 일들의 기록이지만 한 개인의 역사는 그 개인에게 의미있는 날을
중심으로 기억되겠지요? 제겐 오늘이 바로 그런 새로운 장을 연 역사에 해당하는 날이랍니다.
무슨 날이기에 그렇게 거창한 표현을 쓰느냐고요?
오늘 아침 계절 학기에 등록하고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서야 하는 보람이에게 순전히 제 힘으로 만든
여러 가지 반찬으로 밥상을 차려 준 날이거든요.
이런 일은 생애에 처음 있는 날이라서 (그리고 그것을 마지 못해서 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
새벽에 아이와도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제는 생애에 처음으로 가장 오래 부엌에 있었던 날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어제가 기억해야 할 날일지도 모르지요. 어제 밤 만든 음식으로 오늘 아침 상을 차린 것이니 )
그 와중에 레서피 만으로 시도하는 음식이 제대로 될까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보람이가 말을 꺼내더군요. 엄마, 그러고 보니 바로 그 날은 아니어도 지난 해 뱅쿠버에서
언어 연수 시작한 날이 6월 22일인가 그러니까 내게도 그 때가 역사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네 ..
그 아이에게도 그 사이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으니까요.

목요일, 9시부터 바이올린 작은 선생님에게 렛슨, 프랑스어 수업, 미술사 수업, 그리고 역사까지 오전중에
3시간동안 제겐 4교시 수업이 있는 날, 새벽부터 일어나서 등대고 누울 시간도 없었던 탓일까요?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잠이 쏟아지고, 아른아른하게 들리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소리에 활을 긋는
첼리스트를 상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개운한 몸으로 일어나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데 점심을 먹으러 들어온
아들 ( 꽉 짜인 시간표를 싫어해서 지금은 혼자서 재수를 하고 있지요. 문제는 세 끼를 다 집에서 먹는 것인데
들어오면 아무래도 바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아서 마루를 차지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아야 하는
그래서 마찰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제 밤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가 그 시간을 너그럽게 봐주면 자신은
공부하는 데 하등 걸리는 것이 없는데 문제는 엄마라고요 ) 어제 밤의 말이 생각나서 그렇다면 네가 쉬는 시간동안
엄마는 밖에 나가서 시원한 곳에서 책을 좀 읽다 들어오겠으니 타협을 해서 몇 시까지 놀 것인지 정하라고 했지요.


페기 구겐하임에 관한 책 한 권 들고 카메라를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입시때까지 시간에 대한 강박을 이겨낼 수 있다면 (아들이 시간을 제대로 못 쓰는 것에 대한 -아니 못 쓴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 자신이고 본인의 생각은 다르기깨문에 생기는 갈등이므로 ) 이 시기도 그리 나쁘지 않으련만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네요.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이기도 한 페기 구겐하임의 생애를 미술사에서 유럽 초현실주의자와 미국의 떠오르는
화가들을 연결해서 그들에게 준 자극으로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가 꽃피게 한 중요한 인물로서, 그리고 그녀의
콜렉션으로 인하여 미술사에 커다란 획은 그은 여성으로서 창작자 못지 않은 공헌을 한 인간 페기 구겐하임을
다룬 책은 1941년 포르투갈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이 됩니다.
자신도 유대인이므로 유럽에서 전쟁 시기를 지내는 일은 공포를 수반하는 일이었겠지요?
그녀를 포함한 11명의 일행이 리스본에서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일,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다 진행되는 와중에 어떤 인물들을 만나게 될 지 흥미가득한 책이긴
한데 한참 읽다보니 들고 온 카메라가 마음을 재촉하네요.


멀리 떠날 수 없는 날이 대부분인 제겐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새로 피어나는 꽃을 발견하고 찍는 일이 주는
잔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


집에 들어오니 아직도 아들은 (보람이는 이라고 쓰면서 아들은 이라고 쓰게 되는 이유는 아이가 엄마
내 이야기 혹시 인터넷에 쓰는 것 아니야? 하고 물어본 이후에 무의식적으로 이름쓰는 것을 피하게 되는
소심함이 발동되어서 ) 서성대고 있었지만 어제 밤의 대화 이후에 저도 결심한 바가 있어서 좋은 말로
인사를 하고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안나돌리님 같은 고수는 자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더 많다고 하지만 저같은 초짜는 자신의 사진에
감동해서 (?) 자축하는 날 늘 고르던 모네를 뒤에 미뤄두고 자축을 사진으로 하는 이런 파격을 부리면서
낮 시간의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중...이것도 해방된 감정의 표출일까요?
-엄마가 아이에게 자신이 한 음식으로 밥상을 차려준 것이 무슨 역사적인 사건이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제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 한 것이 바로 음식만들기였고, 그래서 늘 도망을 다녔더랬지요. 그러다가
올해 처음으로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품앗이로 요리 교실을 만들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공부도 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중에 드디어!! 혼자 힘으로 상을 차리는 일에
성공한 날이라서 제겐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