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웬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냐구요?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을 읽다가 에피쿠로스가 보낸 편지의 한 구절에서 갑자기 한 세상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방망이로 맞은 듯한 기분, 참 오랫만이네요.이런 느낌이
평생 무엇인가를 읽어 왔지만 왜 나의 삶과 나의 공부는 일치하지 못하는가가 화두였는데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알아내는 일, 그래야 엉뚱한 추측을 삼가고 삶의 쾌락에 도달할 수 있다고, 우리가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에피쿠로스와는 엄청나게 다른 그가 책 속에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박사 논문으로 썼다는 에피쿠로스, 마르크
스의 저서에 철학을 입히려고 노력한 알튀세르가 관심갖고 주목했다는 에피쿠로스, 이번에는 강신주가
에피쿠로스와 스피노자,그리고 프로이트의 연결고리를 물고 늘어져서 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월요일 에세이 초록을 써가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그 이전에 생각하던 것을 과감하게 바꾸어서 바로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초록을 썼지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원래 과제보다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고
그 때 제가 잡은 제목이 바로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꿈꾸다 였지요.
역사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인 그는 아테네 교외에 정원을 사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고 하네요.
이 정원에는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하고 유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고 하는데, 여자들이나 노예들도 동등한 구성원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고요.
물론 제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정신적인 지지를 할 수 있는 그룹을 말하는 것인데 수유 +너머에서 발견한
것,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일상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 서로 잘 아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라인 상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교류하면서 나누기등 다양한 형태가 생각나는군요.

우체국을 오다 가다 만난 부부,그들과 함께 한 점심 (이 점심도 일부러 같이 먹자고 약속한 것이 아니고
우연히 밥먹으러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다시 만나서 함께 밥먹다가 우연히 나온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서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영어책 함께 읽고 그 뒤에 요리를 배우고 (물론 제가 일방적으로 배우는 것이지만
저말고 모든 사람이 선생이 되고 그 중에서도 또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집을 제공한 마리포사님의
살림 노하우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압력밥솥으로 콩수프 혹은 콩죽을 만드는 방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시식한 다음 나도 집에 가면 하고 불끈 결심을 하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 함께 나누어 먹는 일까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일회성 행사가 되지 않도록 두 주일동안 집에서 더 시도해보고 만나는 아침 , 그 전에 배운
요리를 직접 숙제로 만들어가겠다고 약속을 했지요. 이렇게 스스로 규정을 해두어야 제대로 이 모임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언젠가 자기 규제가 없이도 스스로 음식만들기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들어서 부슬 부슬 비가 오는 길을 걸어오면서 정말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공부한 책은 한국어로는 몰입의 재발견이라고 번역이 되어 나온 the evoving self인데요 introduction만
읽었습니다, 서문 부분에서는 그 이전의 책 몰입의 즐거움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그 책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책이 끝나갈 무렵 저자는 다음에 무엇을 더 써보고 싶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간결하고도
짜임새있게 소개가 되어서 그 전 책을 못 읽은 사람에겐 책 한 권의 개요를 다 맛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읽기가
되기도 했지요.


몰입의 재발견 ,영어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 이 책을 읽고 내 개인에게는 어떤 식으로 대입해서
변화를 꾀할 수 있는가와 영어로 말하는 일에 부담을 덜고 서로 편하게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긴 호흡으로 갈 수 있는 모임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그래서 오늘 별 다른 정보없이 왔다가 영어가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지혜나무님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서 첫 날은 제가 조금 편한 방식으로 한 줄씩 다 해석하면서
해설을 다는 방식으로 진행을 했지요.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면서 아,재미있다,저절로 그런 느낌의 신호를
보내는 그녀가 재미있었고 드디어 그녀의 방어벽이 뚤리는 것을 지켜보는 신기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꼭 영어로 읽어야 하는 책은 아니므로 동네에서 가까운 이웃들,혹은 서로 알고 싶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책도 읽고 다른 함께 하고 싶은 일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 나름의 정원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