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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 조회수 : 1,750 | 추천수 : 108
작성일 : 2009-07-13 09:19:16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육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 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
.
.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소꿉칭구.무주심
    '09.7.13 1:03 PM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오늘도 하루를 살며 .....고운글 감사드려요

  • 2. 길벗
    '09.7.13 1:55 PM

    다시 또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합니다. 역시 좋은시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 3. 들꽃
    '09.7.13 6:33 PM

    접시꽃의 아름다운 姿態와 고운 빛
    그리고 배경의 완성인 검정색 액자까지 너무 잘 어울러지는 사진이예요.

    거기에다가
    도종환시인의 접시꽃 당신을 올려주시는 안나돌리님의 멋진 쎈수~!!

  • 4. 캐드펠
    '09.7.14 1:44 AM

    앞으로도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하겠지요.
    잊고 있었던 시 였는데 다시 보니 옛날 생각 납니다.

  • 5. 탱여사
    '09.7.14 9:40 AM

    온 몸으로 내리는 비를 안으며 꿋꿋하게
    서 있는 접시꽃을 요 며칠 사이 보면서
    나도 저렇게 최선을 다해 서 있기를 ....

  • 6. 자매
    '09.7.14 4:26 PM

    안나돌리님 항상 고마움을 전합니다
    님의 사진을 보며 많은 위로를 받는 한사람이에요

  • 7. 정가네
    '09.7.15 12:57 PM

    안나돌리님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힘내서 아자 아자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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