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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그 후로 지금까지.

| 조회수 : 10,120 | 추천수 : 5
작성일 : 2023-10-22 20:39:58

처음 아빠와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내 마음이 무슨 마음인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일상은 공장 컨베이어 벨트처럼 잘 돌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비바람에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는 까만 비닐봉다리처럼 갈피를 못잡고 펄럭였어요.


<오랜 친구와 여행가서 아무것도 안하기 했어요... 아침상>

 
그런데 생각 한 줄기가 송곳처럼 마음을 찔렀어요.
이번 상실은 그냥 보내선 안돼. 
어릴 적 엄마와 헤어질 때 비현실성에 압도되어 울지도 못했지.
그 후 몇십년을 딱딱하게 석회하된 마음 이고지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했니.(나와 내 가까운 사람 모두)
가슴을 아무리 쳐도 밤고구마 세 개가 늘 가슴 한복판을 막고 있는 듯 울어도 울어지지 않았잖아. 
이번만큼은 제 때 제대로 슬퍼해보자. 나를 위해서. 


 <소나무와 하늘이 있는 도서관 자리-이자리에서 졸기도 울기도 많이 했어요>

내게 가장 익숙한 도서관, 솔나무와 햇빛이 있는 창가에 앉아 죽음에 관한 책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를 위해 울어주는 듯한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도 그들을 위해 울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1인석 소파가 띄엄띄엄이라 조용한 눈물에 손수건이면 됐어요.
그렇게 감정의 빗장을 겨우 열었어요.


<막내가 좋아하는 열무김치를 담갔어요. 망했..>

 

<송편은 집앞에서 샀고>

 

 <추석때 친한 친구 부부가 와서  일상다반사(茶飯事)를 나눴어요>

 

아빠 건강하실 땐 같이 대화도 여행도 가본적이 없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시간은 쓴 바 없이 다 바람에 휘발되었고, 게으른 자는 해질녁에 바쁘다던데 딱 그짝이었죠. 지난 몇십년간 못해봤던 것을 몇 달 동안 속성으로 해치웠어요.
죽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강렬하고 날카롭게 관통하며
흩어질뻔한 조각의 중앙을 꼬치처럼 줄줄 꿰주던지요.


<이 시간을 함께 보내준 가족에게 고마워 다녀온 근거리 여행>

 

어릴 때, 아빠가  
뒤로 나를 불러내 먹이고 돈을 몰래 쥐어 주며
너, 나 없으면 고아야..라고 하시며 
자조적인 듯, 나를 불쌍해하는 듯 알 수 없이 웃으셨는데 

그 사랑이 나에겐 도둑 아빠가 훔쳐온 빵과 같았네요.

매번 허기가 나를 이겨서  허겁지겁 몰래 목구멍에 쑤셔넣을 수 밖에 없지만 
그 빵은 내 허기를 더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여전히 배고픈 내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몰라요.
아빠를 싫어해야 할지 고마워 해야 할지도 몰랐지요. 
그런 아빠가 저는 필요했지만 동시에 싫었거든요.
저는 아픈 아빠의 곁에 있을 때 그런 과거의 나를 
하나씩 차례로 다 만났습니다.


<도서관 다닐때 가볍게 샌드위치 도시락으로>

병실에 있다가 지치면 나와서 이어폰을 꽂고
박완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가까운 사람을 혐오하고, 
밉살스럽게 행동할 때
내가 인간성 꼴찌를 면한 것처럼 반가웠어요.

아 다행이다. 나만 못된게 아니어서.

 






<도시락 도시락 도시락>

아빠를 보내드리고 오니 계절이 바뀌었어요.

저는 곧 일상으로 돌아왔고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다시 착착 돌아갑니다. 
여전히 저는 잘 웃고, 마녀처럼 잔소리하며 살지만
내 마음에 물에 젖은 솜이 켜켜이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 솜 위에 누름돌을 살짝 얹으면
물기가 주르륵 새어나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많이 씻어냈어요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몰래요.

아빠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내 인생에 대한 애도가 컸던 것 같습니다.

주어졌으나 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요.

사람 겉으로만 보고 마음이 어떨거라고 짐작하는거 아니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마음의 가닥이 오래된 셀룰라이트처럼 엉겨있어 
누군가와 나눌 수도 없어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전엔 내가 잊혀진 존재가 될까봐 초조했는데
이젠 어느때보다 혼자의 시간이 나를 채워준다고 느껴요.

 


<큰딸과 시간 보내려고  아이 입맛대로 먹은 마라탕. >



<아침 동무 메리와의 가을산책..잔등의 꽃이 예뻐서>

 

아빠가 가시면 더 홀가분하고 더 자유롭기만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징검다리의 가장 넓직한 돌 한 개가 사라져 
어떻게 개울을 건너야 할까 주저하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무기력과 무망이 커다란 바람덩어리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누를때도 있죠. 
그래도 저는 이전보다 더 잘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어제 저녁. 만만한 오볶>

 



 

생노병사와 희노애락, 
모든 때가 아름답다는 성경의 말씀을 진하게 체험했습니다.

내가 지나온 모든 슬픔과 원망 고통의 순간이 쾌락과 행복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아빠가 남기신 
‘사랑하는 우리 딸’이란 말과,

죽음을 통해 배운 
‘지금, 여기서 사랑하며 살기’란 진실을
잊지 않으려고요. 

3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챌시
    '23.10.22 8:53 PM

    아큐님, 와주셔서 감사해요. 읽으면서, 많이 생각하게되는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올려셨네요. 많이 공감 하면서 읽었어요. 저에겐 아큐님의 글이 소리내서 누군가
    읽어주는 오디오북 같아요. 아버님 이젠 천국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아큐님에게도 토닥토닥 위로를 건네드리고 싶어요. 힘내세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 아큐
    '23.10.26 12:44 PM - 삭제된댓글

    챌시님. 잘 공감으로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큐
    '23.10.26 12:52 PM

    챌시님 환영해주시고 공감으로 잘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2. 별헤는밤
    '23.10.22 9:21 PM

    일요일 밤을 이렇게 아름다운 수필로 마무리하네요

  • 아큐
    '23.10.26 12:44 PM

    별헤는 밤님, 닉네임이 아름다워요. 감사합니다.

  • 3. 코댁
    '23.10.22 10:08 PM

    너무 귀한 글 잘 봤습니다
    아버님께서 영면하시길

  • 아큐
    '23.10.26 12:45 PM

    코댁님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더는 힘드시지 않다는 점이 저도 좋습니다.

  • 4. 낮달
    '23.10.22 10:26 PM

    삼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아큐 님의 마음에 위로를...

  • 아큐
    '23.10.26 12:46 PM

    낮달님의 위로에 저도 감사드립니다.

  • 5. juju
    '23.10.23 12:55 AM

    문장 하나 하나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쓰신 글 같아요.
    살아있다는 것이 어느 때는 그 자체로 버거울 때가 있지요.
    애쓰셨습니다.
    아버님 명복을 빕니다. 더불어 아큐님이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큐
    '23.10.26 12:46 PM

    주주님 애썼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에게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려 애쓰고 있어요.

  • 6. 뭉이맘14
    '23.10.23 11:08 AM

    아버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사진도 아름답고,
    글도 공감되는 부분도 많고 표현력에 놀라며 여러번 읽았습니다.
    이 가을에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아큐
    '23.10.26 12:47 PM

    뭉이맘14님이 좋은 마음으로 잘 읽어주셨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 7. 예쁜이슬
    '23.10.23 2:40 PM

    아버님은 이제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시고 계실거에요
    그러니 아큐님도 기운내시고 항상 평안하셨음 좋겠어요

    아큐님 한 줄 한 줄 글을 넘 잘 쓰셔서
    초여름에 돌아가신 아빠 생각에 많이 울었네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고 수고 많으셨어요

  • 아큐
    '23.10.26 12:48 PM

    저도 예쁜이슬님 댓글 읽으며 한 번 더 울컥 했습니다.
    우리 비슷한 시간을 보냈네요.
    많이 애쓰셨습니다.

  • 8. 봄봄봄
    '23.10.24 3:03 PM

    어떻게
    그러실수 있었죠?
    속성으로 죽음을 건너고 오늘도 삶을 살고.
    존경 합니다…

    사진도 너무 좋아요, 취향저격.
    자주 자주 뵈어요, 우리. 꼭!

  • 아큐
    '23.10.26 12:49 PM

    속성이 또 아쉬운 대로 채워주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취향이라니 생애 처음 듣는 칭찬, 마음에 쏙 듭니다. 감사합니다.

  • 9. 오늘도맑음
    '23.10.24 4:41 PM

    차분한 글 속에서 큰 슬픔을 서서히 깨달음으로 승화시키시는 모습이 보입니다...다행이에요. 괜찮아질 거에요. 늘 그래왔듯이요.
    이 와중에 감나무 아래 고양이 발견하고 기뻐합니다. :)

  • 아큐
    '23.10.26 12:50 PM - 삭제된댓글

    오늘도맑음님, 저 사진의 화룡정점이 바로 감나무 아래 고양이입니다.
    알아봐주셔서 기쁩니다.

  • 아큐
    '23.11.25 2:40 PM

    오늘도맑음님, 저 사진의 화룡점정이 바로 감나무 아래 고양이입니다.
    알아봐주셔서 기쁩니다.

  • 10. 홍부라더쓰맘
    '23.10.26 11:51 AM

    몇년 만에 로그인을 하게 만드는 좋은 글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얼굴 한번 뵌 적 없지만 왠지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은 느낌이라 글이 마음속에 콕콕 박히네요

    좋은 글 나눠 주셔서 감사하고
    며칠 남지 않은 가을 멋지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아큐
    '23.10.26 12:51 PM

    홍부라더쓰맘님, 친구가 귀한데 친구 같은 느낌이라 해주시니 제 마음도 덩달아 친밀감 느낍니다.
    며칠 남은 가을을 즐겨보겠습니다. 친구님도요...

  • 11. hoshidsh
    '23.10.26 2:24 PM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메리 양 뒷모습을 보고
    왜 이 글이 저에게 이리도 촉촉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건지 알았어요.
    메리 견주님 글은 예전에도 읽으면 눈에 늘 눈물이 고였거든요
    메리가 아니라 아버님이, 그리고 남겨진 따님이 주인공인 글이지만
    메리의 까만 눈동자가 세상을 바라보듯이
    자기 속내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쓰신 글이
    제 마음을 많이 흔들어 놓았습니다.

    지금은 애도의 시간.
    잘 건너고 계시리라 믿고, 또 그리 바랍니다.

  • 아큐
    '23.10.26 6:39 PM

    발음이 제대로 되려나 호쉬드쉬님,
    메리 이야기에도 같이 마음을 적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도하며 또 저 답게 명랑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12. 그래
    '23.10.26 6:01 PM - 삭제된댓글

    목울대가 뻐근하게 아플만큼 눈물이 차오르네요.
    아버지 좋은 데 가시기를 빌어드려요.
    아큐님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 13. 그래
    '23.10.26 6:09 PM

    목울대가 뻐근하게 아파오네요.
    아버지 좋은 데 가시기를 빌어드려요.
    아큐님도 건강히 잘 지내세요.

  • 아큐
    '23.10.26 6:38 PM

    저도요. 아빠와 좋은 곳에서 다시 만나고 싶네요.
    그때는 막힘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 14. 고독은 나의 힘
    '23.10.27 3:31 AM

    애쓰셨어요.
    애도 또한 결국 나를 위한 것이더라고요.

  • 아큐
    '23.10.28 8:30 PM - 삭제된댓글

    네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의 화살은 여전히 저를 가르키고 있네요...
    '고독은 나의 힘' 요새 제가 새기는 말인데 닉네임으로 쓰시니 반갑습니다.

  • 15. 아큐
    '23.10.29 12:01 AM

    네 맞습니다.
    '고독은 나의 힘' 요새 제가 새기는 말인데 닉네임으로 쓰시니 반갑습니다.

  • 16. 쑥과마눌
    '23.11.3 9:42 PM

    많은 감정이 여러번 걸러져 쓰신 아큐님 글을
    천천히 며칠을 두고 읽네요.
    가만히 안아 드리고 싶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 아큐
    '23.11.25 2:41 PM

    감사합니다. 쑥과마늘님.
    가만히 안아 주신다면 가만히 저를 맡기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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