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이벤트 주제 너무 좋은것 같아요
요리를 못하는 저도 추억만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 지니 말이예요~
제 아버지는 실향민이셨어요
1.4후퇴때 함경남도 북청이라곳에서 13살 어린 나이에 부모와 어린 여행동을 놔두고
강제 징용을 피해 '잠시만'헤어져 내려온다는 것이
1995년 53세라는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영원한 이별이 되어 버렸었지요.
한 잔 걸치신 날이면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라는 노래를 부르면
휘청휘청 집으로 걸어 오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제 아버지가 기억으로만 설명해서 만든 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통시미'와 가자미 식혜였지요
물장수로 유명한 아버지 고향 북청은 아마도 바닷가와도 가까운 듯 합니다.
그리워 하던 음식들은 거의 바다에서 나는 것들이였거든요
통시미는 한 겨울철만 먹는 음식으로
명태를 배를 가르지 않고 아가미쪽으로 내장을 모두 꺼내야 하는게
제일 중요했어요
그리고는 소금에 살짝 절이는 동안 속을 만들었지요
저도 어릴적이라 기억은 가물가물해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더듬어 보면
잘익은 김치를 잘게 다지듯 썰고 두부를 으깨어서 마늘 파 참깨를 넣어
만두속처럼 치대어 반죽을 만들어요
잘치대어진 속을 명태 아가미쪽으로 길게 모양을 만들어 넣고 명태 배를 훑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게 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순대지요
오징어순대처럼 동태로 만든 김치순대라고 생각하시면 될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통시미는 이쑤시게로 아기미 입구를 봉하고
일주일정도 밤낮으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건조를 시켜요
동태입에 커텐고리를 끼워 빨래줄에 걸었었지요
그렇게 적당히 말린 통시미를 쪄내고 겉을 다시 연탄불에 구워요
지금도 생각하니 그 새콤한 속과 담백쫀득했던 동태살의 조화에 침이 넘어 가네요
(제가 사진이 없어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사진출처:빅토리안 스타일)
두번째로는 흔히 강원도 지역 음식으로 알고 계시는 가자미 식혜여요
아버지는 식혜를 담는 가자미는 꼭 어리고 잔잔한 것이여야 한다고 주장하셨어요
그래서 저희 자매는 아버지와 새벽 자갈치시장 공판장에 따라가서
아주머니들이 빨간대야에 파는 아기 손바닥 만한 참가자미 새끼를 사왔어요
그날은 거의하루종일 가자미 손질을 해야했어요
너무 잔잔한 새끼들이라 그랬죠
그 잔잔한 가자미 새끼들을 젓갈담그듯이 엄천난 소금이 밤새 절였어요
그럼 다음날 아침에 가자미들이 꼬들꼬들해진 모습으로 우리는 맞아 주었죠
다음은 조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야해요
차조가 아닌 꼭 노란 매조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그럼 쌀가게 아줌마가 물으셨죠..
"새 밥 줄라꼬?"^^
고슬고슬 노랗게 지어진 조밥에 고추가루와 마늘 생강을 넣고 꼬들꼬들해진 가자미를 넣고 버무렸지요
그 다음은 투명 항아리에 담아서 꾹꾹 눌어준다음 담요로 싸서 아랫목에 하루 이틀 정도를 놔뒀어요
그러면 가자미 식혜가 삭으면서 집안에 꾸리한 냄새가 진동을 했드랬어요^^
하루에 한번 담요를 들춰서 물이 얼마나 찼는지를 아버지는 보셨어요
그래서 물이 2/3정도가 차오르면 이차로 작업을 들어갑니다.
지금 시중에 파는 가자미 식혜는 무를 아주 굵게 썰었는데
제 아버지는 아주 가는채를 원하셨어요
가늘게 채썰은 무를 소금어 절여 꼭짠뒤
시큼해진 가자미 식혜와 고추가루를 더 넣어 버무려서 먹기 시작했답니다.
처음은 가자미의 형태가 있지만 다먹어 갈즈음은 가자미가 삭아서 형태를 알아볼수가 없어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저희는 실향민이 였기에 가장 가까운 친척이 아버지의 사촌들이였어요
그 친척들집에 놀러가면 그 집들은 식해를 동태새끼로도 담고 갈치 새끼로도 식해를 담궜지만
제 아버지는 가자미 식해외에는 드시질 않으셨네요
아마도 제가 한번도 뵌적 없는 할머니가 가자미 식해를 잘해주셨나 봅니다.
저 두가지 음식은 언니와 제가 너무나 그리워 하는 음식이지만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아파트 생활에서 냄새도 그렇고 말리기도 그렇고
항상 추억으로만 먹고 있는 그리운 음식들이네요
추억을 먹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