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셋째 딸이다.
아들을 기다린 부모님의 기대를 배반하고 나온.
엄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숨을 안 쉬었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살려볼 시도를 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할머니가 어떻게든 숨을 돌려보려고 나를 주물렀다고 한다.
할머니의 정성이었는지 (그렇게 믿고 싶다) 나는 살았다!
그리고 할머니 살아계신 동안 줄곧 사랑 받고 살았다.
할머니에겐 내 형제들을 비롯한 사촌들까지 많은 손자손녀가 있었다.
내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긴 했지만
어째서 그 많은 손자손녀 중 할머니가 그토록 나를 예뻐하셨는지 의문이다.
살아계실 때 여쭤 볼걸 그랬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그건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냥 할머니와 나는 잘 맞는 한쌍이었으니까.
나는 어렸을 때 잔병치레가 잦았다. 지금 건강한 것에 견주면
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병치레를 자주 했다.
그때마다 나서서 나를 구해주신 건 할머니였다.
나는 큰 편도를 가진채 태어났고 그 때문에 환절기마다 감기로
된통 고생을 해야 했다. 군 의무대에서 군생활을 했던 아버지는
우리가 아프면 엄마더러 주사기부터 데우라, 고 명령하셨다.
주사 맞는 거 너무 무서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버지도 무서워
울며 주사를 맞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나 안 그래도 큰 편도가 감기에 걸려 부어 있는 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물은 커녕 침 조차 삼키기 어려워 나는
감기로 드러눕기 일쑤였다. 밥을 못 먹으니 기운도 없어서
2,3일 학교를 빠지곤 했다. 그런 나를 안타까이 바라보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양은주전자를 꺼내시고는 어디론가 가셨다.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가면 포구가 나왔는데
그곳까지 할머니가 직접 걸어가셔서 양은주전자에 사온신 건
살아있는 문어! 였다. 힘없이 누워서 밖을 내다보면 대문을 열고 한 손에
주전자를 들고 오시던, 수건을 두건 삼아 쓰신 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할머니는 그걸 아마 삶으셨을 거다. 그 일은 늘 내가 아픈 사이에
일어났으니 나는 할머니가 그 살아있는 문어를 어떻게 손질하고 요리하셨는지
잘 모른다. 다만 부엌에서 뚝딱, 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엉겹결에 잠든 나를 깨우는 할머니의 손길을 느끼고 눈을
뜨면 접시에 먹기 좋게 썰어진 문어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문어를 사오던 시점은 내가 어느 정도 나아가는 걸
인지하고 난 다음이 아니었나 싶다. 할머니가 접시에 담긴
문어를 내밀 때마다 내가 맛있게 먹었으니까.
다른 형제들은 나중에 남은 걸 주었는지 어쨌는지 그땐 신경쓸
겨를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막 손질해서 요리한 문어는
우선은 내가 먼저였다. 다른 형제들은 손도 못대게 하고는
내게 그걸 한 접시를 먼저 먹이셨던 것이다.
나는 그걸 먹고 거짓말처럼 일어나 다음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학교로 향하곤 했으니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어가 아이 때 몸을 보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걸 알고서 내게 먹이신 문어가 나를 일어나게 했겠지만
나는 지금도 문어보다 할머니의 정성이 나를 낫게 했을 거라 믿는다.
중학교 전까지 나는 매번 일년에 두세번을 그렇게 앓았고
할머닌 그럴 때마다 어느 시점에서 양은주전자를 들고 대문을 나서곤 하셨다.
내가 지금 건강한 건 할머니의 정성이 내 몸에 남아있는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주 감기에 걸려 고생할 때마다 나는 할머니가
나를 낫게 하신 문어를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 서울 변두리의 재래시장까지를 뒤져도 살아있는 문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생문어는 유통이 거의 되지 않을 시점이었다.
어쩌다 수산시장 같은데서 삶은 문어를 사다가 먹어 봤지만
그 옛날 할머니의 그 문어 맛하고는 너무 달랐다.
지금도 나는 마트의 수산코너에서 삶은 문어라도 마주치게 되면
할머니 생각을 떠올린다. 그리고 멀리 러시아에서 잡혀왔다는
삶은 문어를 사온다. 다행히 약간은 질깃하고 씁쓰름한 맛이 나는 것
같은 이 러시아산 문어를 우리 딸이 좋아한다.
냉장고에 있는 초록색나는 야채와 당근이나 파프리카를 채썰고 초고추장과
문어를 올려 회초밥을 만들어 주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알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저한테 숱하게 들려준 우리 할머니표
살아있는 문어를 금방 요리한 그 구수하고 쫄깃한 식감의 찰진 문어를 맛을.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내가 할머니께 효도한 기억은 별로 없는 거 같다.
다만 지금도 그나마 뿌듯하게 기억하는 일은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봄이었던 때, 학교에서 효도잔치가 있었는데
그 순서 중 하나로 재학생 대표로 노래를
불렀던 일이다. 음악담당 선생님이 정해주신 ' 봄 처녀 제오시네'를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일주일 정도를 연습했던 것 같다.
떨리지 않으려고 할머니쪽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으니
우리 할머니 표정이 어쨌는지 잘 모른다.
노래를 무사히 부르고 무대를 내려오긴 했으나 무척이나 떨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려나 그래도 나는 그것이 우리 할머니께 드리는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도 두고 두고 그 일을 친구분들께 자랑하고 다녔으니
그 한가지는 확실하게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린 일이라고 지금도 자부한다.
할머니 맞나요? 하고 묻고 싶지만
우리 할머니는 나 중학교 3학년때 불현듯 돌아가셨으니
지금은 물어 볼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