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들만 둘을 두고 있는 불쌍한 엄마입니다.
올해 나이 20살, 17살.
위에 아이는 이번에 재수를 하였고 작은 아이는 고1입니다.
두 아이가 초등 3,4학년을 지날 무렵부터 무척 많이 먹기 시작하더군요.
햄버거를 사면 한 아이당 두 세트를 사야하고
칙힌은 두 마리는 주문해야 합니다.
피자도 큰 것으로 한판이 10분 정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고기는 아이들 아빠 포함 세 남자가 앉은 자리에서 한끼 반찬으로 1키로를 먹기에
소고기집으로 외식하는 것은 꿈도 못 꿉니다.
큰 아이는 요즈음에야 폭풍 흡입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작은 아이는 여전합니다.
작은 아이 학교는 급식이 그래도 참 잘 나오는 편입니다.
급식 도우미로 참가 할 때 마다, 나도 식비 내고 학교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있게 나옵니다.
그런 급식을 먹고도 집에 오면, 현관 문 닫자 마자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죄로, 매일 그 아우성을 들어야 합니다.
새 밥을 미리 해 놓거나 반찬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요즘은 그도 귀찮아서 새로 개발한 꽤 괜찮은 배달음식점을 자주 이용하지만,,,
매일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집에 있는 재료들 뒤져서 뭐라도 만들어 놓곤 합니다.
이날은 식빵이 남아 있어 어설프게나마 샌드위치를 만들었습니다.
샌드위치용 햄이 없어 긴 소세지를 반으로 잘라서 얼추 모양만 냈습니다.
맛은 괜찮았습니다.
사실, 제일 준비가 간편한 반찬은 고기지요.
달 군 도기팬위에 겉면만 익혀 내는 정도로 불 위에 두었다가 상으로 옮기면 고기가 아주 부드럽게 익습니다.
된장찌게 남은 것과 무김치, 상추를 갖춘 간.식. 입니다.
오후 네 시경 이렇게 한끼를 먹고 오후 8시경쯤 다시 배고프다고 합니다.
제 소원 중 하나는, 아들들이 어서 성인이 되어 요리학원에 다니는 것입니다.
한식, 일식, 양식으로 가정식을 배워서 제 입에 들어 가는 음식 정도는 스스로 남부럽지 않게 만들어 먹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이제 본론을 씁니다.
내일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남편과 대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원하는 후보가 혹시라도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 보다 5살이나 많은 남편이 그러더군요.
우리는 이미 인생의 절정기를 지났고, 사회가 주는 혜택-기회를 다 가진 세대이지만,
우리 아이들 세대는 정말 힘들거야, 라고요.
이제 대학에 들어가고, 이제 사회에 나갈 저 아이들를 우리 사회는 어떤 얼굴로 맞을까를 생각해 보니
남편의 말이 일리가 있었어요.
그동안 보고 겪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는 사실 희망보다는 걱정스러움이 더 많은 상황이니까요.
84학번인 저는 잘못 쓰여지는 공권력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오늘 쓴 이 글이, 먼 훗날,
나의 아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을때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는 내 아이들이 엄마 때문에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솔직히 겁이 납니다.
한 10년간은 단 한번도 걱정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어느덧 그런 두려움이 이름 없는 아줌마의 일상에 다시 강하게 스며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기적인 이유로 또는 요모조모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고 투표하는 이들이 상당히 밉기도 합니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이라 제대로 보고 들을 기회가 없어서 그런 분들이야 하는 수 없지만
교육과 사회적인 부분에서 수많은 기회를 (스스로의 노력 이상으로) 얻어 편한 삶을 사는 이들이
그 삶은 어떤 이들의 희생과 소외를 바탕으로 형성 되었는지를 전혀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묻지마 투표를 해대고
그래서 결국은 어떤 이는 불에 타 죽고, 어떤 이는 투신하고,
또 어떤 노약자들은 더위에 추위에 굶주림에 고통 받게 하는 것을 보면,
그런 맹목적 추종자들이야말로 조용한 살인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미움이 커져 가끔은 분노하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지켜 보면서
우리가 오늘 왜 이런 상황으로까지 왔는지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스테판에셀 옹은 분노해야 변화가 있다고 하셨죠.
도대체 왜 저런 미련한 사람이 전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제가 제 나름으로 내린 결론은 이것은 공업 共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선 또는 악의 업을 짓고 그 결과 공동으로 고통의 인과응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선과 의를 행해야 할 때 주저하고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 선행은 실천하기 어렵고 악행은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생각과 공부가 게을러서 결국 미욱한 사람을 지지하고 있으면서
그러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 그들을 미욱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대로 된 정보와 현상을 전달해야 할 사람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이었던 탓입니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이들은 또 왜 그들의 행태를 멈추지 않은 것일까.
역시나 그 부분을 지적하고 매섭게 야단쳐야할 이들이 많이 없는 탓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의 형상이 더 커진 모양새가 되기도 합니다.
선업을 쌓는 일, 악업을 쌓는 일, 정치...복잡하고 어려운 듯 하여도 사실은 매우 간단합니다.
悲心, 타인의 아픔, 힘 없는 사람들의 삶, 약자들의 삶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그런 삶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는 마음이 있고
어떻게 하면 개선되는지를 아는 이를
우리 사회, 나의 의견을 대표하는 이로 지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共業은 언제나 계산이 정확하였습니다.
시민사회에 속하여 살면서 이 사회가 주는 혜택을 모조리 받고 있는 우리는 투표로 그 혜택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투표하지 않는 것,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은 악업 惡業을 짓는 일입니다.
부디 선업善業들 쌓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