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행복한 새해 되시길...
키톡 역시 낡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식탁 이야기로 훈훈하네요.^^
저도 연말연시 먹고산 이야기 하나 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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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팠던 남편님이 드디어 오셨습니다.
즐겁게 일한다고는 하지만 산더미 같은 회사일과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알기에.
최대한 편안하게 쉬었다 갔음 했는데...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질거라는 불안함을 어떻게든 털어버리려는 제 조급함과
살이 많이 빠진 남편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남편 오면 맛있는거 먹어야지 별렀던 제 식탐까지...
이것저것 요리하고 또 요고조고 사서 먹여보다가
귀국을 며칠 앞두고 남편은 급기야 제대로 체하고
체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소매치기에게 핸드폰을 도둑 맞는 일까지 생겼다지요.
일로 몸도 마음도 지친 남편을 멀리까지 오게해서 고생시킨 것이 아닌지
내내 미안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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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먹은 열흘.
남편 핸드폰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는데, 도난으로 몇 장 안 남은 기억들.
1. 마드리드 도착 기념 만찬
남편 오는 비행기가 마드리드 도착편이라서 부러 마드리드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여벌 옷은 귀찮아서 안챙겨도 바스크 지방 치즈랑 빵을 짊어지고 갔지요 ㅎㅎ
에어 비엔비를 통해서 유스호스텔 더블룸 가격으로 마드리드 중심가의 원룸을 빌릴 수 있었습니다.(관계자 아니에요.^^;)
저녁에 숙소에 도착한지라 근처 슈퍼마켓에서 조리가 필요없는 먹거리들을 사서 호사를 부려봅니다.
삶은 거북손(Percebes),
멸치의 일종인 보케론(Boqueron) 절임,
바스크 지방의 이디아사발 치즈,
손으로 저민 이베리코 하몽,
아스파라거스와 올리브 통조림,
그리고 스페인의 샴페인 격인 까바.
여기 살면서 맛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모아 남편이랑 함께 먹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선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가격또한 만만치 않을텐데 장 본 금액은 2 만원 가량이네요.
돈 쓰고선 벌었다는 얼토당토않은 느낌. ㅎㅎ
한국에선 말로만 듣던 거북손을 여기서 처음 맛보았어요.
저 손톱과도 같이 생긴 부분의 아래를 찢으면 주황빛의 육즙이 터져나옵니다. 기둥 부분에 쫄깃한 살이 들어있어요.
플랑크톤을 먹고 자란다는데, 그래서인지 바다맛이 진하디 진합니다.
이베리코 하몽이랑 양젖 치즈, 올리브, 아스파라거스 절임.
하몽은 뭐.. 두말할 것 없이 맛있고(손으로 자른 것이 도톰하니 더 맛있더라고요),
남편은 아스파라거스 절임이 부드럽고 감칠맛 난다며 잘 먹습니다.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해안에서 잡힌다는 보케론을 식초와 올리브 기름에 절인 것입니다.
여긴 보케론, 안초아(앤초비), 사르디나(정어리) 등을 염장한 요리들이 정말 많아요.
병이나 캔에 담아서 파는 것이 보통이지만 가끔 식당에서 직접 절임한 것도 맛볼 수 있는데,
어느정도 비린맛을 즐기는 제게는 너~어무 맛있게 느껴지네요.
이 곳에서 축하주로 많이 즐기는 까바도 빠질 수 없지요~
프랑스의 샴페인 제조 방식으로 만들지만, 샴페인과는 다른 종류의 다양한 포도를 사용하는 데에서 독특함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스페인의 샴페인으로 불렸지만, 최근에는 프랑스의 항의로 EU 법에 의해서 까바라는 이름으로만 불리게 되었다고 해요.
저희가 마신 꼬도르니우는 19세기에 스페인 최초로 까바를 시장에 내놓았다는 와이너리입니다.
병 목에 씌어진 Brut 은 두 차례의 발효를 마친 후, 1 리터 당 12 그람의 설탕을 첨가해서 비교적 드라이한 까바를 의미하고요.
조금 더 세분화된 분류가 있지만 카바의 당도는 대략 Brut-Seco-Dulce 순으로 구분되며, 후자로 갈수록 더욱 답니다.
몸통 라벨의 Cuvee 는 한 가지 포도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의 포도를 섞었다는 이야기고,
Gran Cremant 은 기포가 많아 톡 쏘는 질감이 아니라 크림과도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라는 뜻이래요.
이 모든 정보는 나중에 공부한 내용이고요, 사실은 세일 중이라는 5 유로 내외의 저렴한 놈을 고른 겁니다.
2. 산 세바스티안 도착 기념 식사
한 밤에 도착해서 냉동 해물과 시판 양념으로 급조한 빠에야.
연일 빵만 먹고 오랜시간 버스를 타야했던 저희는 소화가 안되서 쌀을 먹어야 했지요.
나름 맛이 괜찮게 나와서 뿌듯했어요.
곁들임 주는 남편이랑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상큼하게 톡 쏘는 맛이 좋은 카탈루냐 지방의 에스트레야 담 맥주의 특별판,
Estrella Damm Inedit 을 꺼냈습니다.
3. 학교에서 배운 요리 퍼레이드
학교에서 배운, 실기 시험에도 나왔던 파프리카 소스의 속을 채운 고추 요리,
제가 정말 좋아하는 스페인 파(영어로는 Leek이라고 알려져 있는) 요리,
바스크 지역에서 나는 소세지, 치스토라와 또르띠야(감자 오믈렛)로 만든 핀쵸(타파).
그리고 사과주 시드라!
특히, 파 요리는 그냥 파를 끓는 물에 넣고 무르게 삶아서
기름과 식초, 소금만 뿌린 것인데, 의외로 맛이 좋아요.
소스가 아주 맛있는 고추 요리도 나중에 레시피 공유할게요~
4.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프레시 치즈와 토마토, 루꼴라 샐러드,
이전에 포스팅한 피쉬 케익과 건포도 토스트,
슈퍼에서 사온 삶은 게(Buey de Mar),
늙은 암소 등심 구이(여기서는 소를 그렇게 구분해서 부르더라고요 ㅎㅎ),
게르니카(맞아요, 피카소의 '게르니카' 지역이에요) 고추 구이.
5. 조깅하고 가볍게 먹자며 차린 저녁
앙굴라 파스타와 샐러드.
앙굴라(Angula)는 원래 민물 장어의 새끼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흔히 앙굴라의 모습(실지렁이 같아요 ㅎㅎ)을 그대로 재현한 어묵을 지칭해요. 한국가면 어묵으로 파스타를 만들어도 맛있을 것 같기도 하고 ㅎㅎ
요걸 마늘과 고추 기름에 볶아서 빵에 올려 먹기도 하고 샐러드로도 먹는데,
얼마전 친구가 이걸로 만든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다기에 만들어 봤어요. 담백하고 부드러워서 자주 해먹을래요.
이렇게 먹고 뭔가 아쉬운 마음에 커다란 감자칩 한 봉을 사이좋게 비웠지요.
샐러드엔 피클 대신 여기서 많이 먹는 긴디야 고추 절임을 올렸어요.